대웅전 구역 슬쩍 건너 뛸렸더니 뒷통수가 근질근질 하다. 그렇구먼 내눈에 보였던 중정의 배례석. 혹여 후일에 오시는 님들이 밟고 지나지 않도록 보여드려야겠다. 근데 처음부터 그 자리인가?
영산전 구역. 동화사에서 버젓히 한구역으로 자리매김하였는데 이제는 통일대불전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처음부터 자리매김 하지 않았다고요? 그래도 천년 역사를 간직한 탑을 수하에 두고 있다. 탑의 위치가 모호해 보이지만 지금의 시각과 환경으로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영산전구역의 중심 영산전. 동화사 전각중에 가장 영험한 전각이라고 이뭐고님이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문턱이 닳았고 법당엔 보살님의 땀이 가득하다. 담장을 둘러 별도 공간으로 영산전, 천태각,요사인 금장암이 있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천태산에서 홀로 득도한 나반존자를 모시는 전각은 일반적으로 독성각이다. 천불천탑을 새긴 전탑으로 유명한 청도 불령사도 천태전 현판이었는데 최근에 현판을 교체하였다. 동화사 외 다른 가람에 천태각 현판이 있는가?
대웅전 뒤 조사전. 조선시대 중기에 제작된 보조국사, 사명당대장, 20세기 초에 제작된 극달화상, 제작년대를 알 수 없는 인악당대사 의첨, 용암당대선사 옥인, 환월당대사 지화, 죽암당대선사 선찰, 자월당대사 무겸, 호운당대사 지호, 양운당대사, 환명당대사 일진, 대봉당대사 해익, 인봉당 쾌헌대사, 자월당대사, 영허당대사 묘수, 보운당 봉옥대선사, 현월당대, 팔봉당대사 승휴, 환묵당대사 응률, 포운당대선사 윤경 등 모두 27폭의 조사 진영이 모셔져 있다.
산신각. 10월 초하룻날 산신각에도 보살님들의 예는 끝이 없다. 지극정성 기도하는 바램은 무엇일까? 당신의 안위는 불경죄로 여기시고 자식 잘 되라고, 가족 건강하라고, 손금이 지워지도록. 무릎이 망가지도록 빌고 또 빌고 계신다.
이시간 우리어머님도 칠곡 어느 절에서 나를 위해 저렇게 기도중이라고 생각되어 콧등이 시큰해온다. 오늘은 댓닢바람, 풍경소리마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칠성각. 치성광여래와 일광· 월광보살 삼존이 묘사된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구시의 자랑 나무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 칠성각의 200여년 된 오동나무는 심지왕사를 기념하여 심지대사나무로 명명되어있다.
전각만 살피다 비로암 가는 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석선생은 가을 하늘을 벽공이라했던가? 만산홍엽의 만추에는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도, 벽공도 줄줄 외웠건만 여유가 없는 것인지, 세월이 흐른 까닭인지 입가에 맴돌다 가을하늘로 사라져 간다.
벽공(碧空)...이희승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대웅전에서 얕은 능선 너머 비로암. 이제는 동화문으로 들어온 탐승객에게는 대웅전 보다 먼저 만날 수 있는 전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로암도 삼층탑도 멋진 비로자나불도 안중에 없는 듯 총총걸음이다.
조성 절대년대가 밝혀져 석탑 형식의 기준이 되는 삼층탑은 2층기단, 4단 옥개석 받침, 상륜에는 노반, 복발, 보주가 보인다. 비로암 탑에서 1966년 도난당하였던 사리호가 수습되었는데, 표면에는 '민애대왕추숭□□복업조석탑기[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 시함통사년세재계미무사지월십일기(時咸通四年歲在癸未無射之月十日記)'라는 명문이 있어, 신라시대 경문왕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석탑임이 밝혀졌다. 사리호 외함에는 사방불이 선각되어 있는데, 크기는 각 면이 14.5×15.3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비로암 비로자나불 . 원만하고 둥근 얼굴 곡선의 눈썹과 바로 뜬 눈, 입과코는 다소 작아보인다. 볼륨감은 미미하며 통견을 걸치고, 가슴에는 내의인 승각기가 보이고옷주름이 신체를 감싸고 있다.
광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광배 상단 세분의 삼존불은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불, 가야산 심원사의 깨어진 광배, 창녕 관룡사 초입 불상없이 들판 전각에 모셔진 광배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9세기에 유행했던 광배형식이라 하지만 혹 동일인의 작품은 아닐까?
두광과 신광을 선으로 나눈 주형거신광배로 불상에 비해 다소 큰편이다.또한 광배에는 보상문 덩굴문, 연화문을 새겼다. 좌대도 놓칠 수 없는 답사거리지만 나만를 위해 기도중인 보살님들을 방해할수는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염불암 가는 길 부도. 비뚜로 복원되었어도 가을에 취한 듯, 부도 주인을 닮았을 부도는 시골 촌부처럼 넉넉하고 정이 많은 표정이다. 특이하게 배흘림이 보이는 팔각원당형 부도는 앙련 복련이 보이는 기단, 몸돌, 옥개지붕을 갖추었고 상륜은 멸실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형을 모방한 임진왜란 이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78년 가을 날이 생각나는 산길, 여기 어디쯤에서 보시금을 확인했을까? ㅎㅎ. 장부와 현금 차이, 현금이 더많은 봉투를 확인하고 두 놈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다발 스트레오로 막걸리 한 잔 할까? 사하촌에서 막걸리에 취해 76번 시내버스로 돌아왔지만 그날이 경북대생 대구역 점령사건 날이었다.
유신말기 어지러운 사회 문제로 행사는 보류 취소되었지만 후임 임원진에게 정확히 아주 정확히 장부와 현금이 일치한 보시금을 인계하였었다.78년 동화사 주지스님 발원문을 들고 대불련 행사준비를 위해 동분서주중에 염불암에서 받은 보시금 차이 1만원 횡령 착복한 탓에 이렇게 죄받고 사는가? 속죄합니다. 우리님들 착하고 바르게 삽시다!!!
염불암. 지극히 기도하면 소원성취를 이룰 수 있지만 과욕은 모자람 보다 못하다는 경각심을 깨우쳐주는는 전설이 염불암에는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서 암자를 짓게 되었는데 이 암자에는 불심이 깊은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 스님은 자나깨나 늘 ‘암자 옆에 있는 바위에 불상을 새겼으면’하고 생각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암자 부근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스님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끼니도 잊은 채 불경을 계속 읽었다. 칠 일째 되던 날 아침, 안개가 서서히 벗겨지면서 주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님이 그렇게도 원했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 한쪽에는 문수보살, 다른 쪽에는 아미타여래였다.
그런데, 이 문수보살의 오른쪽 팔꿈치 바로 옆에 10㎝정도 되는 구멍이 하나 있었다. 이 구멍에서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정도의 쌀이 나왔다. 그런데 욕심 많은 스님이 더 많은 쌀을 꺼내려고 막대기로 구멍을 쑤셨다. 그 이후로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의 지극한 기도로 바위속에서 걸어 나오신 아미타 여래, 관음보살, 지금도 염불 소리 들리는 듯 들리는 듯...
염불암 선각 아미타 여래, 구름을 타시고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계신다.
염불암 관음보살. 법의는 길어 양무릎을 덮은 상현좌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대부분 보살상과 달리우견편단 법의가 눈에 들어온다. 염불암 청석탑. 해인사 원당암 청석탑을 시원으로 우리나라에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청석탑이다. 대부분의 청석탑이 그러하듯 탑신은 없고 지대석 위에 10개 옥개석만 포개져 있다. 점팜암 재질의 탑은 파손이 심하지만 옥개석은 얇고 평평하며 모서리에는 살짝 반전이 보인다.
동행한 이뭐고님은 거의 대부분 청석탑에 몸돌이 보이지 않아 혹 청석탑에는 몸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아니냐고 말씀하시고, 탑돌이 누들스는 점판암 재질로 인해 양반, 유생들이 벼루로 가공하기 위해 훔쳐간 것 아니겠냐고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염불암 주전각 극락전 아미타 삼존불. 사죄합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78년 가을 날 제가 범한 욕심을, 죄업을...
가을에는 가슴에 응어리진 모두를 용서도 주고받고, 사랑도 주고받고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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