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림과 겨울 얼음축제, 참꽃축제, 대견사지, 암괴로 인해 전국에 꽤나 알려진 비슬산이지만 초입의 소재사는 크게 알려지지 않는 가람이다. 그 흔한 창건 설화는 고사하고 창건연대, 창건주도 알 수 없지만 속내를 들어다 보면 이외로 튼실하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식 공포이며, 상량문에 따르면면 1673년(현종 14)에 세운전각이며 이후 여러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1676년에 세운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주심포계 공포양식을 하고 있다. 목조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협시로 시왕이 시립하여 생전의 죄업을 씻어주고 계신다.
조선 중기의 목조 지장보살상은 복장기에 ‘10대왕 조상기 발원문(十大王 造像記 發願文)’에 의하면 '康熙 十四 乙卯 四月'라 되어 있어 1675년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통허스님 1주기 제를 올리는 날이다. 그래서 '손잡고 가요' 카페 회원들과 소재사에 들려 생전의 모습을 회고하며 극락왕생을 빌었다.
통허당 스님 입적 관련 기사를 돌이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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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에 육십 대 노숙인 하나가 불쑥 들어섰다. ‘배가 고파서 왔다’고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문상객이 얼른 일어나 접시에 돼지고기를 넉넉하게 담았다. 소주도 한병 챙겨 주었다. 다른 이는 지갑에서 만원 짜리 한장을 꺼내 노숙인에게 쥐어줬다. “통허 스님이 주는 마지막 술, 밥이니까 잘 먹으소.” “스님 참, 마지막 가는 길에도 배고픈 사람 불러들여 밥 먹여 보내시네.”
16일 밤 대구시 중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장례식장 통허스님 빈소 풍경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구 중구 반월당 보현사 앞 무료급식소 ‘자비의 집’에서 노숙인들에게 밥을 퍼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날 밤 스님 빈소는 승가에서 인연을 맺은 스님들과 속세에서 인연을 맺은 공무원이나 자영업자, 기자 등 다양한 이들이 지켰다. 모두들 스님 덕분에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손을 보태 온 이들이다.
스님은 “살만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 써야 세상이 돌아간다”며 인연을 맺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이웃들과 끈을 이었다. 형편 어려운 이웃이 찾아와 손 내밀면 스님은 도움 줄 만한 이들을 대뜸 찾아가 ‘좋은 일 좀 하라’고 팔을 잡아끈다. 그러면 누구도 뿌리치지 못하고 호주머니를 열고 손을 보태게 됐다.
스님은 장애인이 모여사는 집에 쌀이 떨어지면 쌀을 낼 만한 사람을 찾아가 쌀을 구해다줬다. 여기저기서 살림살이를 끌어모아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신혼살림을 차려줬다. 명절이면 신도들이 내놓는 먹거리를 혼자 사는 노인이나 아픈 사람이 있는 가정에 갖다줬다.
“마이 들어온 거 남아서 주는 거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마이 묵어라!” 말투는 언제나 퉁명스러웠다.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 속을 다 안다. 도움 받는 이들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먼저 한 마디씩 던진다. 무료 급식을 하는 점심시간이면 스님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급식소 앞에 버티고 서 있다.
하루 300명이 넘게 찾아오는 노숙인들 중 옷이 얇아 추위에 떨거나 낡아 헤진 신발을 신은 노숙인이 있는지 살핀다. 혹시 그런 노숙인이 눈에 띄면, “왜 이러고 다니냐”고 호통치고는 옷가지며 신발을 챙겨다 줬다.
그래서 통허 스님을 아는 이들은 스님을 ‘밥 퍼주는 욕쟁이 스님’으로 불렀다. 상스러운 말도 거리낌없이 쏟아내지만 둘러앉은 이들을 울리고, 웃기는 입담이 주변에 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스님은 대구에서 태어나 11살 때 콜레라를 심하게 앓은 뒤 전남 장성 백양사로 출가했다. 전남 신안 도초섬 만연사 주지, 강화도 보문사 원주를 지내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절에 살지 않고 대구 중구 남산동 허름한 월세방에서 지냈다.
스님이 입적한 줄을 모르는 이웃들은 여전히 스님을 찾는다. “스님 밥 좀 주세요.” “어머니가 임종하시려나 봅니다. 염불 좀 해 주세요.” “스님, 사는 게 참 힘드네요” 라고. 그래서 경북 칠곡의 백양사에 스님을 모시고 나오는 속세의 인연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55살 너무 일찍 입적한 스님 세수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아직도 스님 손이 필요한 이웃들이 많아서다. 사람들은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면서도 “스님, 너무 일찍 가셨어요”한다.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사진 <매일신문> 제공.
제를 모셨으니 이제 대웅전의 튼실한 속살을 살펴보자.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유례가 없는(?) 협시불이이다.
즉 약합을 든 약사여래와 연을 든 연등불로 1673년에 조성했다고 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본존에비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협시불의 모습이 곱지 않은가?
세정 스님은 못난이 부처라며 껄껄 웃으시며 실력없는 장인의 솜씨라고 말씀하시지만 작은 절집을 큰 도량으로 조성하신 분이 스님 아니신가요?
16세기부터 탱화에 보이는 광배 물결 무늬가 뚜렷하며 길상을 상징하는 卍자를 새긴 영산회상도 상부에는 '탱화복장'이 걸려 있다. 석탑이나 석불 내부에 봉안된 이력카드인 복장 유물과 같이 탱화 조성 내력 기장이다.
우물천장, 퇴색된 단청이 더 아름다운 대웅전 내부 벽면 백의관음보살상으로 세정 스님은 370년전의 작품이라고 한다.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으로 소재사가 중앙 후불 탱화가 영산회상도 보다는 아미타불로 본다면 좌우벽면의 관음 지장 보살과 더불어 아미타 도량이 아니겠는가?
현풍 읍내를 들어서며 15~6년 전 이곳 하향주 이야기를 꺼냈더니 발 넓은 엄 선생님이 민속주인 하향주 전승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하향주는 국화, 찹쌀, 누룩, 비슬산의 맑은물 등을 사용하여 빚은 술로 연꽃향기가 난다 하여 하향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중기 무렵 비슬산 중턱에 위치한 도성암(道成庵)이 병란(兵亂)으로 모두 타버렸는데, 성덕왕(재위 702∼737) 때 도성암을 다시 지으면서 인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임시로 토주를 빚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그 후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비슬산이 천년요새로 군사가 주둔하고 있을 때 주둔대장이 왕에게 이 술을 드렸더니 독특한 맛과 향이 천하약주라 칭찬받았다. 이후 10월 상달에는 조정에 바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조선 중기(1680년경)부터 유가 음동 밀양 박씨 집성촌인 박씨 종가집에서 가양주로 전승되어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 즉 고부전승으로 100년 이상 4대째 전승되고 있음이 각종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음 검색
훈제 오리와 하향주 봄날은 그렇게 익어갔다.
새벽부터 구름과 천둥 번개를 몰고 오신 통허스님도 사시마지를 마치고 따뜻한 봄볕을 남기시고 홀연히 떠나셨고..
카페지기님,깨구리님,도야지님, 무애심님, 이일화(?) 시인, 하향주 전승자 박 사장님
세정스님, 사공님, 대백(?)님
봄처녀가 되신 금이정님. choi님
저녁에 만난 옛님 카페 원행스님
옛님카페 자연님
200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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