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횡성군

[스크랩] 횡성 / 풍수원 성당

임병기(선과) 2008. 6. 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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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고 눈발이 흩날려 남쪽에서 온 촌놈들 기를 죽이는 횡성 땅이지만, 풍수원 성당은  따뜻하게 반긴다.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기후에도 평화로운 기운이 감도는 이 곳은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 살던 곳이 었다.

 

동행하기로 했던 '유현'이 왔으면 어깨힘 주었을 것이라고 동행한 님과 마주보며 웃음지었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라는 지명 때문에...

 

풍수원 성당


고종 27년(1890)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1대 신부로 부임하여 초가 20칸의 본당을 창설하였다. 그 후 고종 33년(1896)에 부임한 2대 정규하(1893∼1943) 신부가 직접 설계하여 본당을 지었는데, 융희 1년(1907) 중국인 기술자와 모든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여 현재의 교회를 완공하였다.

건축 양식은 고딕식으로, 앞면에는 돌출한 종탑부가 있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으로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두꺼운 동판을 깔았고, 내부에는 기둥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벽돌 기둥처럼 보이게끔 줄눈을 그려 넣었다.

풍수원 천주교회는 한국인 신부가 지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한국에서 4번째로 건립된 유서 깊은 절충식 고딕 건축물이다...문화재청


풍수원 성당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1802년 혹은 1803년경에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40여명의 신자들이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풍수원으로, 이곳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이었다.

 

이곳에서 80여년 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여 오다가 1888년에 서울교구장이 풍수원 성당을 본당으로 승격시켜 초대 신부로 프랑스인 르메르(Le Merre) 신부가 부임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성립케 되었고, 춘천․화천․양구․홍천․원주․양평 등 12개군을 관할하여 당시 신자수는 약 2천명이었다.


풍수원 성당은 초가집 20여간에 불과했으나 현재의 성당 건축은 2대 정규하(鄭奎夏, 1863~1943)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중국 페낭 신학교에서 신품을 받고 귀국하여 풍수원 성당으로 부임한 정신부(아오스딩)는 풍수원 성당을 손수 설계하고 부지 1,500평을 마련하여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와 함께 현재의 성당을 착공하였다.

 

신자들이 옹기가마를 만들어 진흙벽돌을 굽고, 목재를 준비하는 등 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하여 1907년에 준공한 후 1909년에 낙성식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한양 250여리 길은 양평 까지만 사람이 겨우 다니는 소로가 있었고, 양평에서 한양 까지는 소금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므로 목재․백회․함석 등의 자재운반이 가장 큰 문제였으나 신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노역에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노역에 참여했던 신자들은 ‘농사와 생계일을 팽개치고 성당건축 노역에만 전념했는데도 풍년이 들었고, 노역에 손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도 신바람이 났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건축양식은 고딕식으로 지붕은 직접 프랑스에서 들여온 두꺼운 동판을 깔았고, 벽돌쌓기에는 백회를 써서 줄눈의 이음새를 처리하였으며, 건물의 기단부분은 모두 석재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대역사는 1년만인 1907년에 완성되었으며 준공기념으로 정규하 신부가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거목이 되어 있다.

 

정규하 신부는 45년간 이 성당을 지키면서 광동초교의 전신인 성심학원을 세워 교인 자녀들에게 한글․한문․수학을 가르쳐 문맹자를 퇴치하였고, 우수학생을 서울 등으로 성직 유학을 보내 국내 어느 본당보다도 많은 신부를 배출해냈다...횡성군청

 

2006.03.13

음악...IMAGINE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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