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스크랩] 원주 / 성황림...성황당 부연 설명 첨부

임병기(선과) 2008. 6. 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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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과 동행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런 고뿔로 불참하여 혼자서 중앙고속도로를 달린다. 새벽 6시 부터 원주 도착했다는 종화는 몇차례 전화를 때린다. 느긋해야 답사가 재미있는데...

 

종화는 결국 원주에서 1차 예정지인 신림 성황림에 도착하여 이장님 면담 후 노인회장님과 함께 성황숲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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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 성황당

 

마을 동수이며, 성황숲속 성황당이다. 왼손으로 꼰 금줄과 밝음 길상을 상징하는 흰종이가 보인다. 강원도 지역은 성황신 뿐만 아니고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한 단종을 모시는 경우도 많다. 성황당은 마을의 제액, 벽사 및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장소 이기도 하다.

 

성황제는 땅의 기운이 가장 강한 정월 보름에 올리는데 이마을에서는 음력 4월 8일, 9월9일에 모신다고 노인회장님은 말씀하시지만 뚜렷한 이유는 모르신다고 하신다.

 

석가탄신일에 올리는 이유가 불교, 토착신앙의 습합으로 보고 싶으며 9월9일은 양의 수인 9가 겹치는 날로 양의 기운이 극대화 되는 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신림 성황당, 성황숲

 

우리나라 온대림의 일부로서 보존되고 있는 이숲은 보자기,귀롱나무,느룹나무,졸참,갈참, 신갈나무,털피나무 및 털야광나무등을 비롯한 50종 내외의 목본식물과 그 밑에서 자라고 있는 비슷한 숫자의 풀로 구성되어 있다.한쪽에는 습지가 있어 혼지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양쪽에 내가 흐르고 있어 식물이 자라는데 필요한 습기를 공급하고 있어 식물의 생활에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숲은 치악산록에 정착한 선구자들이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치악산의 성황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던 서낭숲이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지켜온 결과 남은 숲이다...원주시청 홈

 

신림의 또다른 성황당


눈이 흩날려 상원사 길을 포기하고 신림으로 나오는 길에 만난 성황당이다. 마을 숲이 조성되지 않아 당산목 아래에 당을 모셨다.

 

끈질긴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일과, 현실의 부조화, 기근을 벗어나고자 손금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빌고 빌었던 우리 할머님들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200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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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따라서 서낭당(城隍堂;경기,황해), 할미당(老枯堂;전남), 천왕당(天王堂;경북), 국사당(國師堂;평안도), 국시당(함남) 등으로 불린다. 서낭신이란 마을의 터를 지켜 준다고 믿는 신이다.

서낭이라는 말은 중국 고대에 성읍의 수호신인 성지신(城地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육조(六朝)때부터 성황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전해져서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그 자취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서낭당의 형태는 돌무더기만 쌓여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당집이 마련되어 있는 경우, 혹은 마을에서 섬기는 신목 하나만 뎅그러니 있는 경우도 있다.

성황당의 문을 열면 대개의 경우 시루나 흰실,혹은 한지를 접어 놓거나 비단을 걸어 놓는다. 시루야 말할것도 없이 풍요로운 생산을 의미하는 것 일테고 흰 실타래는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며 한지나 비단을 접어 놓은 것은 신에게 드리는 예단의 경우가 많다.

서낭제는 자정이 되어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도가에서 음식을 준비하거나 허드렛일을 하고 남자들이 제이 쓰일 돼지도 잡고 젯상도 준비한다. 제를 맡아서 준비하는 도가집이 정해지면 금줄을 쳐 잡스런 것들의 접근을 금하고 가능한한 바깥 출입도 삼가며 부부관계도 멀리하여 신을 만날 마음을 다스리던 것이다.


마을신앙은 마을에서 수호하는 신을 마을 신당에 모셔놓고 제액초복(除厄超福)을 위해 해마 다 마을공동체 단위로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는 것이다. 그 동안 동신신앙이라는 용어를 사 용했으나 근래 들어 마을신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마을신을 모신 곳은 동신당·동제당·신당·당·당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를 마을신앙이라는 표현과 맞 추어 마을신당이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올리는 제의를 동신제. 동제. 동고사 등으로 일컫 는다. 경우에 따라 마을제사, 또는 마을굿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 마을신앙의 형태와 종류 마을신당에 모셔져 있는 마을신은 하나의 신일 수도 있지만, 10위 또는 20위인 경우가 있다. 여러 신이 모셔져 있는 경우는 주로 무당에 의해서 당굿이 행해지는 지역에 해당되는데, 주 신(主神)을 중심으로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다.

 

예를 들어 서낭당 안에 주신인 서낭신을 중심으로 그 밖에 지신·산신·장군신 등의 신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유가식 동제를 행하는 마을신당에도 마을신이 둘이나 셋이 모셔져 있 는 경우가 있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상·중·하당의 삼당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은 산을 등지고 남향해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뒷산 턱에 산신을 모신 산신당이 있고,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길 옆에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으며, 그 옆에 장 승이나 솟대가 있는 것이 동신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다.

 

그러나 요즘은 이 삼당을 모두 갖추 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마을신당은 본래 동민들이 신앙하는 신격의 명칭을 따라 산신을 신앙하면 산신당, 서낭을 신앙하면 서낭당이라고 한다. 신당 안에는 신이름을 쓴 위패 하나를 모시거나 또는 위패도 없이 동신당만 있던 것이 뒷날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이 커지면서 주 신상 이외에 다른 여러 신상들이 덧붙여지는 것이 상 례이다.

 

당나무만 있는 마을신당이나 당나무 밑에 자연석 제단만 있는 마을신당에는 나무로 간소하게 만든 위패조차 없다. 이와 같은 당나무 밑에 당집을 지어놓고 격식을 갖추게 되면, 마을신의 이름을 쓴 위패를 안치한다.

또 여기서 더 발전하여 신상(神像)을 모시기도 한다. 주신(主神) 하나만 그린 신 상을 모신 경우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이 확장, 강화되는 데에 따라 다른 신상들이 부가된다. 마을신은 크게 자연신 계통과 인신(人神) 계통으로 구분된다.

 

전자에는 천신(天神)·산신· 산신령·칠성신·지신·서낭신·용신·국사신·도당신·토지신·사해용신 등이 있으며, 후 자에는 단군신·공민왕신·태조대왕신·김유신장군신·최영장군신·남이장군신·임경업장군 신·부군신·송씨부인신[단종비]·각씨신·애기씨신 등이 있다. 이밖에 도교계통의 옥황상제 라던가 노인신도 있다.

 

마을신당의 형태는 당나무만 있는 것을 그냥 당(堂)이라 부르는 신수(神樹) 형태, 이와같은 신수 밑에 장방형의 자연석으로 된 제단이 있는 형태, 신수와 그 옆에 돌무더기 형태, 신수 밑에 한 칸 정도의 당집이 있는 형태, 그리고 신수가 있거나 또는 신수가 없이 당집보다 건 물이 큰 전각 형태 등이 있다.

 

마을신당은 신앙하는 마을신에 따라 성격과 명칭이 결정되기 때문에 마을신의 종류와 일치 하는데, 지역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한다. 국수당과 산신당, 서낭당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마을신당이다. 특히 중부지역에서는 이 세 종류의 동신당이 한 마을에 복합되어 있다.

 

마을의 배후 높은 산정에 국수당이 있고, 그 산 중턱에 산신당이 있으며,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에 서낭당이 있으면서 그 옆에 장승과 솟대가 함께 있는 예가 많았다. 근래에는 국수당 과 장승·솟대가 점차 사라져 산신당과 서낭당만 남아있는 마을들이 많다.

 

호남지역에는 당산(堂山)이라 일컫는 마을신당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당산은 산신을 신앙하는 산신당의 변형 형태로 보인다. 영남 동해안 지역에는 골매기당, 서해안 지역은 임 장군당[임경업장군], 제주도는 본향당, 서울과 경기도는 부군당이 집중되어 있다. 골매기당은 그 마을을 수호해 주는 터신과 방어신을 신앙하고, 임장군당은 풍어 전설에 기반을 둔 어업 시조 신앙으로, 부군당은 지역수호와 풍요 신앙으로, 본향당은 근원 상징 신앙으로 각기 그 성격을 드러낸다.

 

서낭당은 산신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명칭이 유사한 성황(城隍)이 있는데, 이들은 애초와 다른 것이었으나 복합되어 오늘날 에는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서낭신앙은 우리 고유의 신앙인 반면 성황신앙(城隍信仰)은 중국의 성지신앙(城池信仰), 즉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성의 외곽에 해자(垓字)를 파서 그 파낸 흙을 해자 밖에 쌓은 흙더미에 방어적 의미를 부여해 신앙하는 것이다.

 

중국의 이 신앙이 고려 문종 때 들어왔다고 하는데, 한국 재래의 서낭신앙과 성황신앙의 구성내용과 그 명칭이 비슷한 관계로 서낭을 성황이라 일컫는 것이라 본다. 오래된 옛 읍지(邑誌)의 시묘조(祀廟條)에는, 반드시 국사단·여제단·성황당이 있어서 관 주도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의 성황단제는 중국식의 성황신앙과 관련이 있 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전승되는 서낭신앙은 그 성황과는 관계가 없다. 마을신앙의 보편적인 형태는 국수당·신당·서낭당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신당신앙이 한국의 마을신앙의 기본적 형태로 한 마을에서 신앙되면서 여기에 장승과 솟대신앙이 추가, 복합된 것으로 본다.

 

마을신앙의 발전 단계로 본다면, 먼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국수당을 마련 해 천상의 신을 지상에 모셔 마을을 보살펴 주게 하였다. 이 후 그와 같은 산 전체가 신성 하게 여겨지면서 신격이 형성되어 산신을 신앙하게 되었고, 다음에는 이와 같은 산신을 동 구에 모시는 서낭신앙이 형성되어 밖으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운 등을 막아내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천상의 신이 최초로 지상에 내려와 정착하는 단계가 국수당이고, 그 연장선상 에서 산신당, 그리고 서낭당 신앙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상신이 하강하는 산꼭대기 는 단군신화의 신단수, 가락국기의 구지봉에서도 신화로 말해주고 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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