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가장 알짜배기 답사 공부는 그 현장에서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특히나 민속문화지에서는 동구밖 당산목 아래에 막걸리 한병 대접하며 동리의 촌로에게 듣는 마을에 전해오는 구수한 맛의 이야기, 고택 답사시 종가집 종손에게 듣는 가족의 이면사와 범접하기 어려운 당당한 내력에 젖어본 사람은 불치의 역마살 환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며 해설을 하시는 분은 충주 문화방송에서 고정프로도 하셨고,문학 동호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박선예님이시다.토박이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충주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감탄을 넘어 경외심이 든다.
엄청난 공부와 열정이 아니시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유려한 해설이기에 박선생님과 함께한 사람이라면 역마살 환자의 즐거움과, 충주사랑에 매료될 것임이 분명하다.홍천에서 충주 투어에 참석하신 님들에게 탑평리 칠층탑을 중앙탑이라 설명하시며 한반도의 중앙이라 붙여진 별칭이라고 했더니 한반도의 중앙은 홍천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이시더라며 중앙탑 설명이 이어진다.
오늘로 세번째 만난 중앙탑을 첨 보았을 때 안강 정혜사지 13층 탑을 떠올린 까닭이 규모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신라계열에서 흔치않은 다층탑,무엇보다도 높은 토축 위에 자리한 공통점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다.
중앙탑...사진/문화재청
중앙탑!!
무엇 때문에 신라는 유례없는 높은 토축위에 가장 높은 탑을 조성했을까? 단지 강변이라는 특수성 때문일까?
지근에 있는 고구려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원은 한반도의 요충지였기에 삼국 통일 후 신라는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임을 대내외에 공표하고 상징적으로 세운 탑은 아닐까?
하지만 흐르는 강물과 함께 세월이 흐른 후에는 과거길 유생들에게는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이정표 이며, 충주 사람들에게는 눈감아도 떠오르는 고향의 상징물이 되었다.
고구려,통일신라의 석조부재들로 미루어 예전에 절터라고 추측만 할 뿐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중앙탑은 1916년 붕괴 위험을 빙자(?)한 해체복원공사에서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편년이 달라 여러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지방을 너무 사랑하시며 왕성한 충주사랑를 전개하시는 충주전통문답회의 홍인화님은 토축위로 올라오셔서, 상,하층기단 각면의 우주,탱주 숫자의 차이를 지적하시며 잘못 보수되었음을 안타까워하신다.
그 외에도 중앙탑은 지붕돌의 다섯개의 받침, 이단의 몸돌 괴임, 평이한 낙수면,수평의 추녀와 모서리의 반전,풍탁의 흔적 등 신라 계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지만,신라유일의 7층탑, 상륜부의 2개의 노반석은 퍽이나 이채롭다.
200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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