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 / 탄금대

임병기(선과) 2008. 6. 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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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의 과음, 오늘 아침의 덕주사 마애불 답사로 천근만근 이지만 마음은 편하기 그지 없는 것이 충주문답회원들을 만나고, 충주 투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우회도로를 모르고 시내를 경유한 탓에 충주체육관 도착이 늦었지만, 창녕 답사시에 만났던 원정인님,홍인화님,김인동님과 박선예님을 반갑게 해후하고, 역사적 아픔을 딛고 이제 공원으로 충주시민에 품에 돌아온 탄금대에 도착했다.

 

탄금대라는 지명은 신라에 망명한 가야의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였던 데서 연유하였다는 사실과, 임진왜란 시 이곳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 탄금대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달콤한 달천강과 남한강 합수지역에 위치한 犬門山으로 불리우던 얕은 야산이지만 충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충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大門山으로 부른다."라고 박선예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반현숙님이 반겨주시는 탄금대로 올라갔다.

 

열정적으로 해설하시는 반현숙님은 6.25 전쟁 때 충주 출신 전몰자 위령탑은 전국 최초로 순수민간인에 의해 1956(?)건립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라신다.

그 앞에 자리한 12기의 솟대는 가야금 줄을 상징한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솟대를 탄금대 입구에 세웠으면 한다. 우리민속에서 솟대는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오리의 머리방향은 북쪽으로 하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팔천고혼 위령탑(?)의 민간복장을 한 동상을 보고 해설사 선생님은 " 임진왜란이 발발 왜군이  부산 동래를 거쳐 서울로 북상해 오자 신립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지역을 지키게 되었다. 당시 충주는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신립은 유성룡이 모집한 군관 80여명과 함께 훈련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모집해 가며 4월26일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진을 쳤다. 그가 끌어 모은 군사는 겨우 8천여명 이었고 그것도 화살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라고 설명하신다.

 

지금이야 신립장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지만 최근까지도 문경새재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은 신립의 작전 실패라고 알려졌지만 신립은 "이유인즉, 적은 이미 문경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서둘러 조령을 지키는 것보다 넓은 들에 적의 보병을 끌어 들여 이를 우리의 기병으로 요격하면 먼 행군에 지친 적을 가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며 아군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다가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하니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라 하고 지난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었다. 또한, 적이 조령에 다다랐으니 서둘러 옮기는 것보다는 오합지졸인 우리 군대를 통솔하기에는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위령탑 앞에는 350년전 신립과 충주민의 천추 한을 되풀이,또다시 왜놈에게 나라를 침탈당한  일제강점기에 저항 아동문학가였던 이곳 출신의 권태응의 '감자꽃' 시비가 서있다. 

 

                                                                 감자꽃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해아리님의 낭송에 이어 해설사 선생님의 선창으로 나지막히 감자꽃을 따라 부르며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세분의 해설사님은 충주의 문화유산은 물론,숲에 대해서도 박학다식한  설명과, 뗏목으로 서울까지 평소에는 3일 홍수때는 17(?)시간이 걸리는 내륙수운의 요충지로 '떼돈'의 유래가 이곳 남한강 뗏목에서 연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열두대에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부여 부소산성의 백마강을 굽어보는 백화정이 생각나는 탄금정, 낙화암 분위기의 열두대는 "가야금이 12현 열두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이 곳 열두대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박재륜 선생의 글에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지"비문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四月 二十八日  八道都巡邊使 申砬將軍이 從事官 金汝勿과 더불어 鳥銃砲火의 數十萬 倭賊을 槍劍弓矢의 八千軍士로 맏아 싸우다가 戰勢不利하자 金公과함께 敵陣에 突入하여 數十賊을 擊殺한 뒤 彈琴臺 이곳 열두대에서 享年 四十七를 一期로 哀惜하게 爲國殉節하시다."

 

 

2005.06.1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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