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거창군

[스크랩] 거창 / 정온 선생 고택

임병기(선과) 2008. 6. 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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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이번 거창 답사는 문화재 탐방의 기쁨보다 늘 카페에서 좋은 글과 알지 못했던 건축에 대해 이해를
북돋아 주시는 최성호 소장님을 만난다는 것에 더 즐거움이 기대되었기에 가섭암지에서 내려오면서
전화를 올렸지만 통화가 되지 않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는데 동계고택에서 통화가 되어
지금 함안 안의에서 내려 오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에 혼자서 고택을 들어섰다.
다음 백과사전에 동계 정온 선생을 조회해보았더니
" 동계 정온(1569-1641)은 조선 시대의 유학자요, 정치가이며, 문인이었다. 광해군 6년(1614)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남을 상소하였다가 10년간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
되었다. 
유배 생활 동안 그는 가지고 온 경사 수백 권의 책을 벗삼았고, 대정 현감이 적소에 서재를 지어 주자, 
그 곳에서 지방 유생들을 교학하였다. 그리고 먼저 유배와 있던 송상인, 이익 등과도 시문을 교류하였다. 
그는 중국 은대부터 남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곤란과 우환을 당하여도 정도을 잃지 않았던 59인의 
행적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자성서로 삼았고, 매년 정월 초하루 새벽이면 자경감을 지어 자기 성찰에 
힘썼다.
  인조 반정 후 복귀되어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힘하였다. 병자호란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화의가 성립되자 자진을 기도했고, 덕유산에 들어가 5년 간의 적거 생활 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주에서 숙종 8넌(1682년) 귤림성원에 그를 배향함은 유배 샐활 동안 제주인들에게 베풀었던 교학 
활동과 병자호란 중 척화를 강조한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동계가 귀양지 제주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그린 시 한수를 감상하며 그의 성품을 짐작해보자.
나이 많으신 우리 어머니(有母年期모)
문에 기대어 얼마나 기다릴까(門閭幾何望)
아이를 낳고도 힘을 얻지못하고(生兒不得力)
자식과 이별한 뒤 가슴만 태우시리(別子但煎腸)
태수되어 봉양도 하지 못하고(未遂專城養)
고향가서 효성 다할 기약도 없내(還迷負米鄕)
언제쯤 성대한 은덕 입어 풀려나서(何時蒙패宥)
다시 색동옷 입고 재롱피워 볼거나(重攬彩衣長) 
이 글을 올리기 전에 최소장님이 보내주신 역저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에 보았더니 솟을 문이 
높은 이유를 단지 반가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성 보다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즉 말이
교통수단이 었던 예전에는 문의 넓이 보다는 높이가 우선적으로 고려된 것이 솟을문이라는 설명을 되새기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조(仁祖)임금이 내린『文簡公桐溪鄭蘊之門』의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문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세화년풍(世和年豊)이 붙여있어 나라를 먼저 생각한 정온 선생 가의 가풍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나
상량문 좌우에 보이는 글은 龍과 虎가 아니라 龜라서 종손이 계시면 여쭈어 보리라 했지만 출타중이라
아직 의문을 가지고 있다.
사랑마당에 펼쳐진 3개의 동산은 도교의 삼신사상을 나타낸 것은 아닐런지 모르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고성 옥천사(?) 대웅전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는 눈썹기와이기에 나중에 오신 최소장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용마루에서 생길지 모르는 누수를 방지하고 용마루를 높게 보이게 함으로서 건물에 위용을 더하려는 
의도라 하신다."
사랑채는 겹집 구조이다. 선산의 쌍암고택이 북부지방에서 보이는 겹집구조라고 예전에 답사기를
올렸더니 최성호 소장님이 조선후기에 가면 겹집구조가 남부지방에도 골고루 나타난다는 설명을
해주신 기억이 있기에 눈썹지붕에 대해 질문을 하였더니 "처음에 지은 지붕은 집의 높이에 비하여 처마의 
깊이가 깊지 않았다. 거기에다 계자난간이 있는 퇴까지 설치하다보니 들이치는 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눈썹지붕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즉 눈썹지붕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건물을 완공한 후 보첨한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답을 내리신다. 
사랑채를 촬영하너라 여념이 없는 최소장님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측면으로 나있는 중문으로 들어 가니
솟을문에 글과는 달리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귀지황금출(歸地黃金出)이 쓰여 있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머금어지며, 종부의 살림살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안채는 정갈하기 이를데 없다.
경주 최씨 집안에서 시집온 종부는 음식 솜씨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뵙지 못함이 아쉽기 그지
없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눈섭 기와가 있는 안채는 정면 6칸 구조라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엌에 
붙여 연이어 2칸의 방, 2칸의 마루, 1칸의 방 구조라 흔히 보는 구성은 아닌 것 같다.
고택 답사의 백미는 종손,종부와의 대화인데 부재중으로 아쉬움이 남지만 훌륭한 길잡이를 만나 
건축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2004.08.0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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