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심적정사 석조불상군

임병기(선과) 2026. 1. 1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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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정사

심적정사는 산청읍내에 위치한 사찰

본래는 산청읍 내리에서 929년(신라 경순왕 3년)에 심적사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6.25 동란으로 사찰이 소실되어 동봉스님이 삼봉산 동룡동으로 옮겨갔다가 1976년 응진전을 다시 지어 석조 불상군을 봉안하였다. 현재 심적정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전, 요사채 등이 있고 소장문화재로는 산청 심적정사 석조불상군이 있다.(네이버에서 발췌정리)

 

예전에는 비구 스님이 계셨으나 현재는 비구니 스님이 계셨습니다.

신중도. 소화18년(1943년)

산신도. 소화 18년(1943년)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도와 독성도가 있다고 했는데, 왜 저는 보지 못했는지...

응진전

석조불상군. 경남 유형문화유산

조선 초에 만들어진 21구의 불상이다. 원래는 신라 경순왕 3년(929) 산청읍 내리에 세운 심적사에 있었으나 한국 전쟁 때 절이 불타면서 삼봉산의 동룡굴에 잠시 모셔두었다. 이후 지금의 자리에 심적정사를 다시 짓고 나한전을 세우면서 불상군을 옮겨왔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나한상* 15구, 보살상 1구, 신장** 2구, 문인석*** 2구 등이 있다. 이 중 나한상은 다양한 자세와 표정으로 생동감 있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움츠린 어깨와 두터운 옷에서는 조선시대에 변화한 불상의 모습이 확인된다. 원래는 22기의 불상이 있었는데, 1기는 한국 전쟁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네이버 발췌)

 

그런데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석가여래. 나한상 16구, 신장상(범천, 제석천) 2구, 보살상은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2구이며 문인석이 아니라 감재사자와 직부사자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즉 23구가 봉안되어 있어 2구는 후대에 다시 모신 것 같습니다.(한국의 사찰문화재를 참고하면 미륵보살이 후대에 조성된 것 같으며, 나한상 1구는 쉽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불단 중앙

석가여래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후대에 봉안?)

제석천

범천

불단(향우)

불단(향좌)

석조불상군의 16 나한에 대한 전설이 전합니다..
옛날 강원도의 어느 절에서 한 스님이 잦은 난리를 피하여 22구의 나한불을 멱서리(짚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 짊어지고 산음 땅에 들려 지금의 내리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밥때가 되어 마을에 들렀다가 돌아와 보니 나한불이 없어졌으므로 사방을 둘러 찾아본 결과 심적사 절 뒤의 숲 속으로 흔적이 있어 따라가 보니 등 넘어 소슬한 절벽의 한 바위틈에 부처가 모여 있었다. 이상히 여긴 스님이 그곳에다 나한암을 지어 부처를 안치하였는데 한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끊긴 나한암에 식량과 불씨마저 떨어진 채 동지를 맞게 되었다.

스님 한분이 외로이 절을 지키면서 팥죽도 못 먹고 굶고 있는데 동짓날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따스한 팥죽 한 그릇이 부뚜막에 놓여 있고 불씨도 피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실에 놀란 스님이 팥죽을 들고 불당에 들어가 살펴보니 한 부처의 입술에 팥죽이 발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상히 여기고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스님이 탁발하러 산 넘어 마을에 가게 되었는데 지금의 삼장면 홍계였다고 한다. 한집에 들어가니 주인이 묻기를 어느 절에 왔느냐고 하므로 심적사 나한암에서 왔다고 하였더니 주인이 반기면서 지난겨울 눈이 많이 온 동짓날 새벽에 나한암 상좌가 찾아왔기에 팥죽 한 그릇을 먹인 뒤 스님이 한분 있다고 하므로 한 그릇 팥죽과 불씨를 주어 보낸 일이 있는데 밤길에 잘 도착하였더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즉각적으로 동짓날 아침에 있었던 기적이 머리에 떠올랐고 팥죽의 주인과 그리고 입술에 팥죽이 발린 나한부처의 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한암에 돌아온 스님은 더욱 부처님을 알뜰히 모셔서 신심을 굳혔다고 한다. 지금도 나한암터에는 많은 흔적이 옛 암자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산청군청 홈)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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