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서룡당 마애탑(부도)

임병기(선과) 2023. 1. 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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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룡당 마애부도

마애부도 2기는 벽송사로 들어가는 옛길로 추정되는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휴천면 동강마을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의중마을~서암정사 구간에 위치한다.

 

의중마을 성황목(느티나무)

 

의중 마을 소나무

 

벽송사 옛길

 

사리공이 없으며, 단독 바위 하부 碑身形 감실 안에 탑호를 새긴 散骨形이다. 塔號인 ‘有功’ 刻字는 마치 벽송사를 중건한 有功이 있어 세운 비석으로 착각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頌詩를 새긴 碑가 아니라 塔이 분명하다. 하동 칠불암의 栢庵性聰(1631~1700)의 탑호 栢庵石龕塔과 비교하면 서룡당 탑호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銘文

瑞龍堂 有功塔(서룡당 유공탑)

 

1850년 벽송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부휴 스님의 11세손이다. 명문을 깊게 새겨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며, 입적(1890년) 시기를 고려하면 19세기말~20세기 초에 조성된 마애부도로 추정되지만 명문이 없어 단정 지을 수는 없다.

 

瑞龍祥玟(1814년 ~ 1890년)

광산김씨. 호는 瑞龍. 서울 출신. 율곡 이이의 제자 사계 김장생의 8세손이다. 17세에 종로에서 官人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세속의 명리가 큰 걱정거리가 됨을 깨닫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로 출가하여 影月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지리산 안국사 龍岳의 講席을 통하여 불경을 배운 뒤 龍巖에게 禪을 배웠으며, 聖典의 法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碧松庵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창하였다. 그러나 자기 본래 면목을 밝히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지리산 칠불암에 가서 수년 동안 좌선하여 悟道하였다.

 

1889년 12월 27일 병을 얻어 29일 열반에 들려고 하자 대중이 과세불공으로 걱정하였다. 그는 “내가 60년 중노릇을 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에 어찌 佛事를 방해하겠는가?”하고 연기하였다.다시 새해 초이틀 또 열반하려 하자 대중이 또 七星齋로 걱정을 하였으므로 다시 연기하였으며, 4일 巳時에 대중으로부터 불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것을 부촉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그는 浮休善修- 碧巖覺性- 暮雲震言-葆光圓旻-晦庵定慧-寒巖性眼-秋坡弘宥에서 鏡巖- 中庵-聖典으로 이어지는 부휴계의 법맥을 이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嶺雲·東雲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편, 근세의 큰 스님인 경허선사가 지은 경허집에 서룡당 행장이 실려 있다.

 

瑞龍和尙行狀

고덕이 “불법이 멸망할까 걱정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나는 도리어 멸망할까 걱정한다. 걱정하지 않는 것도 까닭이 있고 걱정하는 것도 까닭이 있다. 비록 본래 멸망하지 않는 이치가 있으나, 계·정·혜 삼학을 익히고 닦지 않으면, 이른바 멸망하지 않는 것을 반드시 멸망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청산 기슭에 고니와 학처럼 늘어서 있는 것들은 모두 부도이고, 사찰의 누각에 비단 화폭에다 그려 놓은 것은 모두 影幀인데, 이것들 모두 반드시 그렇게 할 만하여 부도를 세우고 영탱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장은 그렇지 않아 행장을 쓸 만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행장을 쓰지 않으니, 삼학의 도를 닦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행장을 써서는 안 된다.

나는 본래 재주는 없고 성품은 게을러 문장을 짓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들의 부탁에 끌려 마지못해 글을 짓기도 하였으니, 그렇게 한 것이 적지 않았다. 매양 행장을 지을 때마다 붓을 멈추고 감회에 잠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저 출가한 사람이 三學을 닦지 않으면 道業을 이루지 못하고, 도업을 이루지 못하면 지을 행장이 없다. 지을 행장이 없는 것은 애석하지 않으나 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애석하니, 도업을 이루지 못하면 부처님의 慧命을 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학이 강령이 되어서 불법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거늘 오늘날 사문들은 이 삼학을 닦지 않으니, 개탄할 일이다.

 

삼가 行錄을 살펴보건대 화상은, 속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光山이며 휘諱는 詳玟이고 瑞龍은 법호이다. 春澤公이 증조이니, 沙溪先生에게 8대손이 된다

화상은 인종仁宗(청나라 황제) 嘉慶 19년 갑술년(1814)에 경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맑고 인품이 순수하였다. 17세 때 종로를 걸어가다가 벼슬아치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문득 세상의 명리가 우환거리임을 알고 싫어져서 무상을 느끼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 影月長老에게 의탁하여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나이 19세에 이르러 명산을 탐방할 뜻을 가지고 지리산에 들어갔다. 당시 龍岳長老가 안국사에서 강석을 크게 열고 있었기에 스님은 그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여 학문이 점차 진보하였고, 다음으로 龍巖和尙에게 參問하여 지견이 열렸다.

 

27세 때에는 騎羊聖典 장로에게 입실하여 道名이 높아졌다. 성전 장로의 유촉을 받고 벽송암에 주석하였고, 암자가 퇴락하자 화상이 중수하여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常住物을 아끼고 사우를 중흥하였다. 그리고 화상은 자기 본분사를 밝히지 못함을 염려하여 七佛庵에서 몇 해 동안 면벽하였으니, 화상의 높은 식견으로 응당 깊은 禪旨를 얻었을 터이나 도가 같은 이가 아니면 알 수 없다.

 

光緖(청나라 德宗의 연호) 16년(1890) 경인년 섣달 27일에 화상은 작은 병을 얻어서 29일에 이르러 열반에 들려고 하였다. 이때 대중이 섣달그믐의 過歲佛供을 걱정하니, 화상은 “내가 중이 된 지 60년인데 세상을 떠날 때 어찌 삼보의 일에 방해될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시일을 끌어서 그 이듬해 정월 초이튿날에 이르러 화상이 또 열반에 들고자 할 때 대중이 또 七星祭를 지낼 일을 걱정하니, 화상이 또 전과 같이 말하고 시일을 끌어서 4일 사시에 이르러 대중에게 묻기를, “오늘 가도 방해될 일이 없겠느냐?” 하였다. 대중이 그렇다고 하자 부촉하는 말을 마치고는 대중에게 경을 외고 염불하게 하고 奄然히 열반에 들었다.

 

경에 “波羅提木叉로 스승을 삼으라.” 하였고, 또 “시방제불이 모두 계정혜에 의지하여 열반에 든다.” 하였다. 화상은 평소 계를 지켜 부지런히 노력하고 늘 조심하여 그 인품은 옥처럼 맑고 순수하였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며, 입적할 때 수명을 자유로이 연장하였으니, 수명을 자유로이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력定力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옛날에 삼학을 정밀히 닦아서 도업을 성취한 이일지라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다.

 

그 법맥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晦庵은 寒庵에게 전수하고, 한암은 秋波에게 전수하고, 추파는 鏡庵에게 전수하고, 경암은 中庵에게 전수하고, 중암은 騎羊에게 전수하였으며, 회암은 葆光의 법을 잇고, 보광은 慕雲의 법을 잇고, 모운은 碧庵의 법을 잇고, 벽암은 浮休의 법을 잇고, 부휴는 芙蓉의 법을 이었으니, 화상은 부용에게 11대손이 된다. 향년은 78세요 법랍은 60세이다. 法門의 동량이 꺾였으니 총림이 모두 불법의 운수가 否塞함을 슬퍼하였다.

내가 光武 4년(1900) 겨울에 화전花田(남해의 옛 이름) 용문사에 들렀더니, 虎隱長老가 화상이 時順동안에 道行이 탁월했음을 크게 칭찬해 말하면서 나에게 행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행장을 써 주길 청하기에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수십 일 뒤 벽송암에 들렀더니, 嶺雲·東雲 두 고덕이 있었으니, 바로 화상의 제자들이다. 이 두 분이 또 先師를 위해 행장을 써 주길 부탁하며 그 청이 더욱 간곡하였다.

내가 회상해 보니 매우 어릴 때 벽송암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 화상을 보니 맑고 엄숙한 道氣가 충만하여 밖으로 발산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적어 법문을 들어 마음의 티끌을 씻지 못했으니, 여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제 나이 55세라, 머리털은 세고 얼굴엔 주름이 졌건만 불법에는 깨우친 게 없어 두 가지 이익을 다 잃었으니 아, 탄식하는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화상의 도덕에 대해 크게 흠모하는 마음이 있는 데다 두 고덕이 지성으로 청하고 호은 장로가 부탁하신 터라, 굳이 사양할 수 없어 문장이 서툰 것도 헤아리지 않고, 이상과 같이 대략 쓰면서 때때로 붓을 멈추고 감회에 잠기기를 재삼 마지않았다.(경허행장.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서룡당 부도 옆 각자.

 

부휴 선사 禪脈, 경허 스님이 지은 경허집에 실린 瑞龍和尙行狀, 東師列傳 등의 문헌을 검토하면 마애 부도 주인인 서룡당의 제자가 동운 스님이며, 의봉당(서룡당 부도 옆에 위치)은 동운 스님의 제자이므로 의봉당은 서룡당의 法孫으로 추정된다.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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