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암 승탑원
파계사 주차장 향좌 측으로 진입, 대비암 입구에 자리합니다.
4기 부도는 지대석과 기단부, 보주가 약간 다르지만 동일 장인 또는 집단의 작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4년 파계사 부도전과 더불어 답사하였습니다.
https://blog.daum.net/12977705/8724360
승탑원(2014년)
거의 흡사한 부도 4기와 현응대사 부도비
부도에는 당호가 없어 현응대사 부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탑비 배면의 명문을 살펴보다가 4기 모두 현응대사 부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과가 수습된 큰 스님의 사리는 분사리하여 각각 사찰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의아스럽지만 조심스럽게 살펴보겠습니다.
현응대사 탑비(2014년)
현응대사는 파계사를 삼창한 스님입니다. 우리가 익히 일고 있는 숙종의 부탁으로 수락산에서 수도하던 농산스님과 함께 지극 정성으로 기도한 결과 이듬해에 왕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숙종임금은 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렸으며, 탄생한 왕자가 훗날의 영조대왕입니다.
부도(1)
부도(1). 2014년
부도(2)
부도(2). 2014년
부도(3)
부도(3). 2014년
부도(4)
부도(4). 2014년
탑비 전면(2014년)
禪宗玄應堂大士高現碑
聖上即位三十六年庚寅七月日立
선종현응당대사고현비
성상즉위 삼십칠년경인칠월일 립
숙종 즉위36년(1710년)에 세움
탑비 배면
대구 이야기와 한국사찰문화재에 등재된 명문이 서로 다릅니다.
대구이야기 명문
한국의 사찰문화재 명문
대구 이야기와 한국사찰문화재에 등재된 명문이 서로 다릅니다.
열순엄귀(烈順奄歸) 부분을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이순암귀(耳順庵敀)로 표현
비(琵)를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왕+왕+왕으로 기록(편집 오류로 추정)
그외에도 비구 법명과 도감 스님의 명문을 비롯 서로 차이가 있어 개략적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명문 해석(개인적 해석)
대사의 휘는 영원이며 옥산 이씨입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약관의 나이에 득도하여 동운선사에게 불법을 인가받았습니다.
법랍 육십에 열반에 들어, 뼈에서 2개, 정수리에서 사리(1개)를 득하여 각각 3개 탑에 봉안하였습니다
또한 1좌(1개 탑)는 백일 동안 흰옷을 입고(.......)하여 사리 1과를 득하였습니다(세웠습니다)
(중략)
부도비는
비구니 흑성(의성)과 계자(제자?)의 청으로 축원(설원)스님이 도감을 맡고, 광학 스님이 별좌를 맡았으며, 한양의 김귀선의 시주로 조성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체 문장 해석은 불명확하지만 4기 사리를 얻어 4기 탑을 조성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대비암 입구 부도전의 4기 부도 전부 현응대사 부도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1707년에 조성된 파계사 원통전 아미타불화 화기에 부도비의 주인공 현응 스님이 증명 비구(證明 靈源比丘)와 화주(化主 靈源 比丘), 도감 설원 스님이 주지(住持 雪元), 별좌 광학 스님이 수승(首僧 廣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응 스님 부도는 파계사 대중들이 합심하여 조성한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의 능력 밖의 명문은 해석 보류
안출신주견실(眼出神珠見失):게송인지, 화두인지 직역 불가하여 득도로 판단하였습니다
비공심계성(琵空心戒性):백일동안 흰옷을 입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중략) 부분의 명문도 저의 능력으로는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현응대사 입적 후 4기 사리를 수습하여 한 곳에 부도 4기를 조성하였을까요?
눈 밝은 답사객의 부도비 해석을 기대하겠습니다.
2021.12.15
포스팅 후 최석훈님이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자료를 찾아 주었습니다
여기도 위 두 명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禪宗玄應堂大士之高現 師諱靈源 玉山李氏子也 童眞出家 冠年眼出神珠 見失 受法東雲 ?究禪源 臘至耳順奄歸圓寂 超骨乞得骨身 二介頂骨 各安石塔三座 又一座 曾於百日 白衣&A3176;供 心契性空 感得舍利一介也 又得唐士識書 始知恨熟宿世也 引勸造成 比丘尼義性戒子 特請都監忍元 別座廣學 京人 金貴善 立碑
聖上卽位 三十七年 庚寅(1710) 七月 日 立
대사의 휘(諱)는 영원(靈源)이며 옥산(玉山) 이씨(李氏)의 자손이다. 동진(童眞) 출가(出家)하였으며 20세에 눈에서 신비한 구슬이 나오더니 실명하였다. 동운(東雲)대사에게서 법(法)을 전수 받고 선(禪)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승랍(僧臘) 이순(耳順)에 이르러 문득 입적(入寂)하시니 뼈 구하는 것을 넘어서 골신(骨身)을 얻었다. 2개의 정수리 뼈를 각각 탑 3곳에 봉안하고, 또 한 곳에서 일찍이 백일 동안 흰옷입고 공양을 바쳐 마음이 성품의 공(空)한 성질과 딱 들어맞아 사리(舍利) 1개를 얻었다. 또 당(唐)나라 승려의 서적을 얻어보니 비로소 숙세(宿世)의 한스러움이 서려있음을 알아 비(碑) 조성을 권하여, 비구니(比丘尼) 의성(義性)과 계자(戒子)가 특별히 도감(都監)인 인원(忍元)과 별좌(別座)인 광학(廣學)에게 청하였다. 서울사람 김귀선(金貴善)이 비를 세움.
성상(聖上) 즉위(卽位) 37년 경인(庚寅) 7월 일에 세움
마지막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탁본을 가져오니 해석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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