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강릉시

강릉...보현사 낭원대사 오진탑. 탑비

임병기(선과) 2021. 7.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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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원대사 부도

2010년에 없었던 데크가 담장을  따라 설치되어 있습니다.

 

낭원대사(朗圓大師)

낭원대사 개청(開淸)은 범일국사의 제자로 사굴산문의 2대 종주입니다.

 

"개청(開淸, 835〜930년)은 사굴산문 승려이다. 속성이 김 씨, 경주에서 출생했다. 8세부터 수재로 알려졌으며, 유학을 공부했다. 출가해 화엄사의 정행(正行)에게 배우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경전을 열람하며, 참선했다. 후에 선지식을 찾던 중 법력을 듣고 범일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안 돼 심인을 받았다. 범일의 입적 후 사굴산문을 지켰지만 이후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강릉 보현사(지장선원)로 옮겨가 사찰을 중창하고, 선풍을 펼쳤다.  개청은 법랍 72세, 세연 96세로 보현사에서 입적했다. 비문에 선사를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고자 지혜의 횃불을 비추었고, 고해(苦海) 중에 자비의 배를 항해하셨다. 지혜는 걸림이 없고 신이한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중생의 도사(導師)이며, 모든 이들의 선각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선사가 당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려 태조가 ‘낭원대사(朗圓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고 했다"(불교신문)

 

낭원대사 부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

팔각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얹어 놓았습니다.

팔각하대석은 저석, 중석, 갑석이 일석입니다. 하대석 중석에는 큼지막하게 안상을 조식하였고, 갑석에는 2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중대석은 망실되었습니다. 상대석에는 복판 앙화를 새겼습니다.

 

탑신석은 8각으로 우주로 구획하고 전, 후면에 문비와 자물쇠를 조각하였습니다

팔각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귀꽃은 훼손된 모습입니다.

 

상륜부에는 복발, 귀꽃이 있는 팔각 보개 위에는 보주 받침(?)이 있고 이상의 부재는 망실되었습니다.

 

기단부

 

탑신부 전면 문비와 자물쇠

 

탑신부 후면 문비와 자물쇠

거의 대부분 자료에 문비와 자물쇠가 전면에만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오류입니다.

 

옥개석과 상륜부

 

930년 입적 후 탑비가 준공된 940년 경에 조성한 부도로 추정합니다.

즉, 당시 후삼국의 사회상, 장례 문화 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국 명주 보현산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
(高麗國溟洲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

 

최언위(崔彦撝) 찬,  구족달(仇足達)이 글씨, 임문윤(任文尹) 각자.

930년 9월 24일에 96세로 입적, 입적한 지 5일 뒤인 28일에 보현사에서 300보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장사 지냄.

이후  신경(神鏡)·총정(聰靜) 등의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시호와 탑호를 내려줄 것과 비문을 찬(撰)해 달라고 조정에 건의. 10년 뒤 태조가 후삼국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려 탑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방형 지대석,

용머리, 6각 귀갑, 운문 위에 비좌에 비신을 세웠습니다
앙련이 새겨진 이수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으며, 중앙에 복발, 보륜, 쌍용과 화염보주를 올렸습니다.

 

 

이수와 상륜

 

이수의 쌍룡

화염 보주 아래에도 쌍용을 용뉴처럼 조각

 

상륜부

용뉴위에 화염 보주를 표현

 

귀부

지대석과 일석

 

영동 부도 순례의 마지막 일정으로 들린 보현사 낭원대사 부도와 부도비

930년 입적 후 별도로 석실에 시신을 매장 한 것은 스님 장례법으로 화장이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10 년이 지나 부도와 부도비를 세운 까닭은  매장법의 변화 추세이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상과, 불안정한 정국을 짐작 가능하게 합니다.

 

202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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