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순천시

순천...팔마비

임병기(선과) 2021. 5. 16.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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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마비

금년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답사 동선에 포함시켰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선정비는 조선시대에 조성되었기에 고려시대에 세운 순천의 팔마비는 가치가 있습니다.

 

"고려 말의 청백리 최석(崔碩)의 송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1281년(충렬왕 7)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이 비서랑(秘書郞)으로 전직하자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관례에 따라 말 8 필을 기증하였는데, 최 부사는 상경 후 기증받은 말 8 필과 최부사의 암말이 승평부에서 낳은 망아지 1마리를 보태어 9 필을 다시 돌려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부터 부사가 오고갈 때의 이런 관폐가 없어졌다. 이에 주민들은 그의 송덕을 기려 비를 세우고 이름을 팔마비라 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승주부사 이수광이 복원하였다.

 

전면 글씨는 진사 원진해(元振海)가 쓰고, 뒤의 비문은 이수광이 짓고, 동지(同知)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원래 이 비는 남문 연자교 옆에 있었으나 하천공사로 현 위치로 옮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복련이 조식된 대좌 상부에 2단 굄을 조출하고 비를 세웠습니다.

바신 상부는 둥글게 마감한 비갈형이며, 전면을 액자처럼 구획하여 글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겼습니다.

 

후면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구분이 힘듭니다.

 

崔碩, 忠烈朝人. 登第累遷昇平府使, 秩滿入爲秘書郞. 昇平故事, 每太守替還, 必贈馬八匹, 倅七匹, 法曹六匹, 惟所擇. 及碩替還, 邑人進馬, 請擇良, 碩笑曰, “馬能到京足矣. 何擇爲?” 至家歸其馬, 邑人不受. 碩曰, “吾守汝邑, 有馬生駒帶來, 是我之貪也. 汝今不受, 豈知我之貪而爲貌辭耶?” 幷其駒授之. 自是其弊遂絶. 邑人頌德立石, 號八馬碑.

 

"승평부에서는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태수에게는 말 8필을 주고, 부사(副使)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석碩이 갈려감에 미쳐서도 읍인들이 말을 바치고 좋은 것 고르기를 청하니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이어늘 말을 골라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내니,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으므로 석이 말하기를“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그 망아지까지(모두 9필) 아울러 돌려주니 이로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으므로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34"(위키 백과)

 

팔마비는 조선시대의 귀부와 옥개석을 갖춘 비석과 달리 소박한 형태이며, 우리나라에 유존하는 선정비로는 효시처럼 생각됩니다. 주차 공간이 없어 도로변에 잠시 정차 후 살펴보아야 하는 애로가 있지만, 순천 답사 기회가 되면 답사 동선에 포함하기를 권합니다.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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