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휴사(臨休寺)
제가 1989년부터 찾는 상인동 달비골에 위치한 절집입니다.
당시에는 한적한 들길을 지나 들릴 수 있는 작은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며 임휴사도 두 번의 화재로 전소되어 3번째 복원하였습니다.
"임휴사는 일찍이 신라 말엽인 921년(경명왕 5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행하여 크게 선풍을 진작하고 귀국한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가 창건한 이래 서기 1811년(순조 11년)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하였으며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寺名)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던 팔공산 지역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견훤을 만나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 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심복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이 이를 진짜 왕건으로 보고 쫓아가 죽이는 바람에 왕건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이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남게되었는데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齋), 왕건의 탈출을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다하여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대덕산은 은적사, 안일사와 왕건이 탈출하다가 임시로 군막을 치고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이 만들어 졌다."(다음 백과)
부도
위키백과사전애는 아래와 같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화재로는 요사 아래쪽 목재 계단 밑에 조선 시대의 부도 1기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1989년 부터 즐겨 찾는 절집임에도 부도는 전혀 몰랐습니다.
"요사 아래쪽 목재 계단 밑"은 현재 진입로가 개설되기 이전의 좁은 산길이었으며 거의 출입을 하지 않는 길입니다.
불과 1주일 전에도 없었는데
요사 아래에 있었던 부도를 옮겨 온 것 같습니다.
종형의 조선후기 부도
복련을 새긴 자연석 기단, 탑신석과 보주를 일 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기단
보주
연주문 받침위에 연봉형입니다.
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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