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정읍시

정읍...무성서원

임병기(선과) 2019. 9. 6.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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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무성리 삼층석탑,석불입상 답사 길에 두어번 까치발로 만족하며 스쳐 지나갔었습니다.

 

오늘은

유네스코에 등재 이후에 당연히 개방되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찾았습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라 하였다.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 뒤 1549년(명종 4) 신잠()의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안세림·정언충()·김약묵(),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헐어 부수어서 걷어 버림)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현가루()·명륜당()·장수재()·흥학재()·고사() 등이 있다"(내이브 지식백과))

 

 

서원의 배치

거의 경사가 없는 평지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홍살문, 현가루와 내삼문, 태산사을 배치하였습니다.

동서재를 동일 공간에 배치하지 않고 담장 밖에 동재만 있으며, 좌우에 비각과 부속시설을 두었습니다.

유난히도 불망비가 많으며, 전후좌우에 비각이 있는 것도 이색적인 풍경입니다.

 

 

현가루

무성서원의 정문으로 이층 루대 입니다.

 

 

논어 絃歌不輟(현가불철)에서 유래하였으며,'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온갖 역경이 다가와도 학문을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갑진중추 甲辰仲秋

사액된 현판은 아니며 후에 다시 건 것 같습니다.

 

 

현가루

외삼문이 없어 주 출입문 입니다.


 

2층 계단


  

배면


 


현가루에서 태산사 외삼문까지  일직선상에 배치되었습니다.

평지에 자리하여

경사진 곳에 위치한 대부분 서원에 비해서 소박하고 안온한 분위기 입니다.

 


강학공간

정면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쪽에는 한 칸 방을 둔 중당협실中堂夾室 구조 입니다.

 

 

현판

병자십일월 일 사액 丙子十一月日 賜額

병자년은 무성서원이 사액된 1696년 입니다.

 


강당 후면

 


강당 대청에서 바라본 태산사 내삼문

 

 

내삼문

유네스코 등재 이후 가장 큰 변화가 사당영역이 오픈된 것 입니다.

태극문양은 길상,벽사의 의미겠지요.

 

 

 

태산사泰山祠

신라말 태산군수로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고 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1884년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최치원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태산사에 봉안된 사람들 중에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습니다.


정극인 입니다.

정극인은 고교 시절 필수 암송 가사의 하나인 상춘곡의 저자입니다.


상춘곡賞春曲...정극인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소나무 숲 울창한 속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 행화는 석양 속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조물주의 솜씨가 물물마다 대단하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거니 흥이야 다를쏘냐

사립문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속 하루가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어 혼자로다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답청일랑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 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칡베로 밭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봄바람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술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작은 아이에게 주막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맑은 모래 깨끗한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곳인가 소나무 숲 가는 길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마을이 곳곳에 벌여 있네

연하일휘는 비단을 펼쳤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으리오

단표누항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 한들 어떠하리

 


병오창의기적비 丙午倡義紀蹟碑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된 것이 알려지자 이에 분개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의병전쟁을 개시하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한 상소를 올리고, 그의 문인인 전북 유생 고석진(高石鎭, 1856~1924)과 최재학(崔濟學)의 권유를 받아들여 1906년 2월 하순경 정읍으로 내려와 임병찬(林炳瓚, 1851~1916)과 함께 창의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6월 4일 수백명의 유생들을 무성서원에 모아 강회를 하면서 창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진을 결성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일제가 조선인 진위대를 앞세워 반격해 오자 최익현은 동족상잔은 불가하다 하여 의병을 해산시키고 그를 비롯한 핵심인물 13명은 체포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읍 지방유림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12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전북서부보훈지청 블로그) 


 

정문술중수의조비각丁汶述重修義助碑閣

무성서원 묘정비인 줄 알았는데....

 


창설의조원 創設義助員

무슨 내용인지...

선정비,불망비를 고의로 촬영하지 않았는데

 


강수재講修齋

다른 서원과 달리 무성서원의 동서재는 강당.사당 영역 담장 밖에 위치합니다.

강수재는 동재이며 서재는 현재 없습니다.

 


강수재講修齋

강수講修는 학문 등을 연구하여 몸과 마음을 닦는 의미 같습니다.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등재 이후 상시 개방 추세이어서 답사객들에게는 고무적인 현상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9개 서원 외의 개방은 요원하며, 전국 향교도 개방에 동참한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지자체, 유림의 적극적인 사고의 전환을 기대해보겠습니다.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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