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윤증(명재)고택

임병기(선과) 2018. 11. 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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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고택

고택은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형지(方形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정원에서 4단석계의 축대를 오르면 오른쪽에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그 뒤로 연접하여 사랑채 후면에서 1칸 물려 왼쪽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앙채 우측 뒤쪽에는 사당이 있다.ㄇ 형의 안채는 북쪽으로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안채 서편 바깥쪽에 광채가 있다. 기와를 얹은 맞담이 중문간채 좌우로 뻗어서 이 광채를 포함한 안채의 양측을 둘러쌌고 배후는 야산이 막아섰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는 튼口자의 안채에 독립된 사랑채가 접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윤증 선생은 이집에서 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평생을 검박하게 생활하였고, 고택은 자제와 제자들이 지었는데 선생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끝내 들어오시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거주하였던 곳은 현재 유봉영당(酉峯影堂) 자리이며, 그 곳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윤증 尹拯(1629∼171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인조 20)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 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윤증은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을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윤증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송시열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윤선거가 죽은 후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윤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윤증은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증은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윤증을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윤증이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윤증과 윤증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다.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직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다음백과사전에서 옮겨 옴)

 

 

사랑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부엌을 둔 작은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 뒤퇴에는 작은마루방이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대청

 

 

 

영한고와 靈閑高臥

 

 

이은시사 離隱時舍

 

 

도원인가 桃源人家

 

 

해시계

 

 

석가산

일만이천봉의 상징이라고 한다.

 

 

사랑채 측면

 

 

중문간채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중문을 내고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1칸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중문

 

 

안채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있다. 그 왼쪽으로 2칸 윗방, 2칸 안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2칸 건넌방, 1칸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안방 전면에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고, 우측의 마루방 앞으로는 2칸 안사랑방과 1칸 작은부엌을 달아내었다.대청 좌우익의 각 방들은 툇마루나 마루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배면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안채

 

 

안채 후원

 

 

안채 후원

 

 

사당

 

 

사당 후원

 

 

돌기둥과 오리

모르긴해도 화재 예방의 비보책으로 세웠을 것이다.

 

 

"고택에는 솟을대문이 없고, 집 앞에는 담장도 없다. 이와 관련해 아픈 사연이 있다.

1805년 고택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던, 공자 영정을 모시는 궐리사(闕里祠)가 근처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1830년에는 2㎞ 떨어져 있던 향교도 바로 옆으로 옮겨왔다. 종가는 자신들을 감시하러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제 궐리사의 관리 등이 수시로 집 앞을 서성이며 출입자를 파악하며 집안을 엿봤다고 한다. 그래서 감시를 받을 바에야 다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그때까지 있던 솟을대문과 그 옆의 담장도 허물었다. 1850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런 사연의 뿌리에는 윤증 가문과 송시열 가문의 대립이 있다.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와 송시열은 친한 사이였다. 주자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해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정통 유학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라며 공격을 받은 윤휴와도 가깝게 지냈다. 송시열은 윤휴와 가깝게 지내는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윤증은 송시열 문하의 수제자이기도 했지만, 그랬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윤선거 부자와 송시열은 결별하게 되고, 여러 면에서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그런 관계 속에 주자학을 철저히 따르는 궐리사와 향교가 명재고택 바로 옆으로 따라온 것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윤증가는 본 것이다."

(해설사의 이야기을 듣고 영남일보 가사를 발췌했다)


 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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