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고전 장림사지 오층탑을 곁에 두고 있어 따뜻한 눈길 받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나도 동호회 부여 답사를 앞두고 시나브로님이 올린 글을 통해서 처음 접했으니 정림사지박물관이 개관 이후 처음 들렸다는 이야기다. 석탑1 2기 이상 탑재의 조합이다. 일견 맨위 옥개석을 제외한 부재는 동일석탑 느낌이다.
옥개석과 상층 탑신석이 일석이다. 경주 현곡면에서 발굴되어 경주경찰서를 거쳐 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석탑, 경주 남사리 석탑에서 시작되어 강원 영서지방에서 대유행한 고려 중기의 석탑 부재이다. 영서지방에서 경기남부를 거쳐 부여까지 흘러왔다는 반증이다. 낙수면의 현수곡선,탑신받침없이 탑신을 올렸고 양우주를 새겼다.
2.3층 옥개석 절수구를 두었고 3단 층급받침이다. 낙수면 물매가 깊다. 현수곡선으로 미루어 탑신위의 옥개석은 동일 석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탑2 2기 이상 부재의 조합이다. 석탑 1보다다 시대가 떨어질 듯하다.
그리고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석불좌상
옛답사기가 있어 참조 사항만 부연한다.
정림사지 사적 제301호.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이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중문 밖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이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 발굴 결과 드러난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은 부여 능산리사지(567년)와 부여 왕흥사지(577년)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금강사지 등 다른 형식의 가람배치로 보고된 사지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중국 북위(北魏) 낙양(洛陽)의 영녕사(永寧寺)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탑내 소상 사례에 비춰볼 때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목탑 내부에 안치됐던 것들로 추정되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건립 전에 5층목탑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출처/정림사지박물관 홈
정림사지오층탑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에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 3층은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두공(枓栱 : 공포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하였고, 통일신라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하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출처/정림사지 박물관 홈
당평제비(唐平濟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방형(方形) 5층 석탑 제1층 사면(四面)에 새겨져 있다.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 석제 유물(石槽)이 구부여군아(舊扶餘郡衙)의 부지내(敷地內)에서 발견됨으로서 평제비(平濟碑)가 두 가지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느 것이 원본(原本)이고 어느 것이 복각(復刻)인가, 아니면 원(原) 비석은 따로 있고 두 가지 모두 복각인가 하는 문제와 소위 평제탑이 이 비명(碑銘)을 새기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가, 아니면 전부터 있었던 탑을 이용해서 거기에 비명을 새긴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8) 정림사터 오층석탑 [서울신문]충남 부여에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없다면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의 흔적은 낙화암 전설로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탑이 사비성에서 제 모습을 유지한 거의 유일한 유적일 만큼 백제 문화는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석불좌상 불상의 신체는 심한 화재로 극심하게 파괴된 데다 오랜 세월 마멸되어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이 신체에 비해 크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도 이들이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남아있는 부분으로 미루어 어깨와 가슴이 빈약하여 신체가 왜소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부 표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으며, 비교적 밋밋한 신체와 어색한 비례를 지닌 불상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왼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간 모습이므로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불상이 안치된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대좌로 통일신라시대에 흔히 보이는 것이다. 활짝 핀 연꽃[앙련(仰蓮)] 모양의 상대석과 안상(眼象)이 조각된 8각 중대석, 엎어진 연꽃[복련(覆蓮)] 모양의 하대석으로 이뤄졌다. 대좌 역시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 형식은 알아볼 수 있다. 하대석을 받치는 지대석에도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복잡하고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좌가 분명하게 통일신라의 전형을 하고 있어, 현재 불상의 대좌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명문기와에 새겨진 대평 8년은 1028년(현종 19년)으로 이때 사찰을 크게 중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석불좌상은 사찰 중수 때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출처/정림사지박물관 홈
비로자나불로 추정. 불두는 후보 하였다.
중대석의 안상은 이중이며 귀꽃을 새겼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정교한 전,측면 안상 근데 후면에는 왜 안상을 새기지 않았을까?
정림사지 오층석탑...김덕남
천오백 년 저 멀리서 한 점 바람 불어온다 옥개석 모서리엔 잃어버린 풍경소리 속가슴 꽁꽁 싸맨 채 그림자로 서 있다
불바다 휩싸일 땐 석탑도 숨이 멎고 붉은 꽃 떨어지는 벼랑 끝 울음터에 백마강 구드레나루 달빛이 젖어 있다
새겨 넣은 적장의 글 비수로 박혀 있어 머리를 짓찧으며 흩날리는 진눈깨비 백지에 그날을 쓴다 핏물 찍어 다시 쓴다 2017.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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