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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 그래서 소원疏遠하지는 않았는지 오래전 인연 짓고 무심히 흘러보낸 시간이 가물가물 작심하고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참 서러운 일이 잖아요.
2016.05.05 창림사지(2006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449
남간사지를 경유하여 작은 산길로 접어 들면 쌍귀부가 있었지. 그 위쪽 민묘앞 솔숲속에 팔부신중과 함께 세월을 엮어가는 석탑이 있었는데...
발굴이 진행중인 절터에서 객은 길을 잃어 버렸다.
잃어선 않되는 그 길을...
이하~ 중앙 볼록하게 솟은 부분이 쌍귀부!!!
마음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몸은 제자리 걸음이다.
내가 잘 못 보았나? 쌍탑지 발굴 안내문을 본 듯 한데...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서 자료를 발췌해왔다.
창림사와 관련한 기록은 삼국유사,고려사, 세종실록, 신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승 김생(711~?)이 쓴 창림사비에 대한 언급이 있어 8세기 무렵에는 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또한『삼국유사』에 금 창림사今昌林寺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는 창림사 불아佛牙를 취해 내전에 두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는 등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시기와 관련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에 금망今亡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전기에는 폐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략) 2011년에 이르러 계림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조사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5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이루어졌으며, 삼층석탑이 있는 영역을 포함한 4개 구역에서는 사지 관련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었으나 나머지 1개의 구역은 이미 경지정리로 인해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유구가 확인되는 4개의 구역 중 석탑의 서쪽에 해당하는영역에서 동-서 방향으로 두 개의 탑지가 확인되었으며, 탑부재도 확인되었다. 또한 탑지 북쪽 편에서 건물지 1개소와 적심, 담장 등의 유구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단판타날평기와편과 수막새편, 암막새편,‘昌林’명 와편 등이다. 이 외에도 목 없는 비로자나불좌상과 사자문 비좌, 경석편, 석등대좌 등의 문화재가 확인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삼층석탑은 과거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된 것으로 당시 2층 및3층 탑신석과 탑재 일부분이 유실되어 신부재로 교체되었다. 1940년 자료에 의하면 1824년 사리장엄구 도굴꾼에 의해 삼층석탑이 무너질 당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가새겨진 동판이 발견되었고, 이를 추사 김정희가 모사해두었다고 한다.
또한 모사본 내용에 삼층석탑은 855년(문성왕 17)에 세운 것이라는 내용이 있으나 석탑 내 동판 봉안이 가능한 공간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문성왕대에 건립되었다고 속단할 수 없다고 한다.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 기조사 자료에는 석탑의 형식으로 보아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팔부중상의 양식도 참고하여 7세기 말~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 연구성과도 있다
석탑은 이중기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층기단면석은 한 면에 탱주와 우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하층기단갑석은 2단의 기단면석괴임이있다. 상층기단면석은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고, 면석부에 팔부신중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그 외 면석은 신재로 교체되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층탑신석에는 우주와 문비가 각 면에 있고, 2층과 3층탑신석에는 우주만 있다. 옥개석은 2단의각형 탑신괴임과 5단의 옥개받침, 풍탁공이 확인된다. 탑의 의 상륜부 중 앙화는 원래 탑이 무너져 있던 북쪽 골짜기에서 발견된 것을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높이 30cm 내외로 석불과 극락조가 새겨져 있다.
창림사지 석탑 앙화...경주박물관
2016.05.05 =====================================================================================================
창림사터는 신라 최초 궁궐터로 전해오지만 그런 자취는 찾을 길 없다. 석조비로자나불을 비롯 창림사지에서 수습한 유물이 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고 폐사지에는 삼층석탑, 목 잘린 쌍귀부, 석탑 부재들만 숲속, 논두렁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오랫만에 다시 찾았지만 예나지나 안내문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고 과수원 옆에 개발세발 멋대로 갈겨논 문화재 보호구역 안내문만 폼나게 서서 답사객을 약올리고 있다.
신라불교미술 정점을 지나 9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쌍거북 비석 받침으로 무장사지 숭복사지 법광사지에서 발견되는 양식이다. 삼국통일후 당의 영향으로 무열왕릉비석 부터 나타나는 거북이지만 초기에는 당당하고 힘이 있다. 그것은 변방에서 삼국을 통일한 강한 자신감의 발로로 비신 뿐만 아니라 석불에도 표현되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신라 명필 김생이 글을 썼다고 전해오는 비신의 쌍거북은 앙증맞지만 힘이 약해보이지는 않는다. 김생의 생몰연대가 711~791년인데 쌍귀부는 9세기에 출현한 양식아니었나?
왜 이런 양식이 나타났을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면 울카페 경주 전문가들에게 욕 먹지 않을지...
학창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멋을 부린 학생은 대부분 품행단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우등생과는 거리가 멀다. 모자창은 수평, 나팔바지, 동복 호크는 개방하고, 검은색 운동화에 하얀끈을 매고 다녔다. 즉, 쌍귀부는 신라석조미술 전형(모범) 귀부를 벗어난 시기에 멋을 부린 귀부로 보고 싶다.
쌍귀부를 벗어나 삼층탑으로 향하는 소나무 숲길 사이사이에는 주추 등 석조부재가 널부르져 있지만 한눈 팔 여유도 없이 삼층탑이 손을 내민다.
하층기단에는 두개 탱주, 상층기단에는 한개 탱주가 보이며 처마의 반전도 조급하지 않다.
신라 석탑에서 최초로 보이는 상층기단의 팔부 신상이다. 면마다 탱주를 중심으로 2구 씩 양각되어 있었으나 일부는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다른 탑과 달리 기단 갑석이 길게 뻗지 않아 비바람에 노출된 듯한 팔부신상을 바라보며 잡생각을 해본다.혹 잘못 설계된 갑석은 아닐까?
5개의 옥개 받침, 일층 몸돌에 문비가 표현 되었다. 높이도 신라하대 석탑에 비하면 아주 높다. 추사가 입수한 글로 인해 신라하대(855년) 9세기 탑으로 추측하지만 딴지를 걸어보자!
우선 높이를 보자. 통일신라 초기 11~13m, 9~11m, 7~9m, 5~7m, 5m이하의 흐름으로 보아 신라하대 탑에 비해 높다. 하기단 2개 탱주도 신라 하대보다는 중기의 특징이다.
탑의 존엄보다 멋을 부린 장식을 강조한 팔부신중,문비,인왕상등은 9세기에 널리 퍼진 유형이지만 장항리사지 탑의 인왕,문비, 원원사지 기단 십이지신상은 8세기 중엽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뿐만아니라 옥개석 받침도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8세기를 정점으로 4-3-2 또는 층마다 달리 나타나는데 반해 창림사지 탑은 5개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어떤 근거도 없는 허튼 잠꼬대일지 모르지만 논쟁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아니면 855년 이탑을 조성한 석공은 아주 멋을 부리는 장인이었거나, 요즘 4~50대가 열광하는 7080분위기 처럼 옛날로 돌아가고픈 복고주의자는 아니었을까?
창림사지...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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