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도 2004년 4월 19일 마지막으로 들렸었다. 당시 2편의 답사기에도 사진은 없고 내용의 오류도 많이 발견된다. 그래도 그대로 두련다. 그역시 나의 지난날 모습이기에. 사진은 2014년.10.26일에 촬영하였다.
무량사
호남을 답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망무제의 들 가운데 취락이 형성되어 있어 사후에는 어디로 모실까? 라는 의문이 오늘도 여지없이 스쳐가지만, 도중에 만난 "지평선 중학교"라는 고운 교명이 여로에 지친 객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준다.
선천적으로 길눈이 밝다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낯선 지역에서는 시행착오도 많이도 경험했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은 한반도 서해안 답사객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보령의 무영탑 이모님이 중간에서 만나 무량사와,성주사지를 같이 동행하자고 하신다.
참으로 고우시다. 고희를 지내신 분이 얼굴도, 말씀도, 표정도 너무 고우시다. 숨김없이 반갑게 맞이해주시고, 긴 여정을 격려해주시며, 사춘기적 소녀처럼 나보다도 더 만남을 즐거워 하신다.이제와 생각하니 무량사 입구부터 손을 잡고 답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들지만, 철없는 조카의 엉석이겠죠?
경주 기림사에도 매월당의 사당이 있지만, 김시습이 운수납자처럼 주유천하 하다 마지막 육신을 묻은 곳이 이 곳 이어서,매월당이 생전에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는 영정을 모신 전각과 부도가 무량사에는 남아 있다.
잠시 매월당의 일생을 살펴보자.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절개의 선비, 생육신(生六臣)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76)를 썼다.
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천재가 세상을 잘 못 만났는지, 세상이 천재를 버렸는지 모르지만 일생을 비속비승으로 살다 간 매월당이 무량사에서 운명 후 사리가 나오자, 스님들이 수습하여 부도를 세우고 영정을 모셔 제를 봉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지만 글쎄? 매월당이 지하에서 과연 웃고만 있을런지???????? 2004.04.19
만수산에 무량사... 만수산(萬壽山)이 있기에 무량사(無量寺)를 창건했을까? 아니면 무량사를 창건 후 만수산으로 불려졌을까?
의미를 가져봐야 공허한 메아리만 뇌리를 울릴즈음 참한 객을 반기는 당간지주를 거쳐 천왕문을 지났건만 사찰의 일반적 전형인 루가 보이지 않고 무량사의 중정이 전개된다. 산지 가람이면서도 진입로가 짧고, 신라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대가 없어 평지가람의 형식을 따른 백제계의 가람임을 알 수 있지만, 잡생각에 구속된 나를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듯이, 석등의 시원으로 회자되는 팔각원당형의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흡사한 석등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는 나를 질책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빠져 화창에 불하나 밝히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석탑을 조성하지 않는 것이 전형이나 교리의 해석은 차치하고 참하고, 아름다운 백제(단층기단,목탑의 흔적), 신라(낙수면의 홈)의 양식이 혼재한 익산 왕궁리의 탑과 닮은 오층탑 네모서리의 풍경소리와 탑신에 흔적이 남은 장식물의 흔들림을 좇아 보지만 언감생심 듣고, 볼 능력이 내게 있을 턱이 있을소냐!
2층의 극락전 앞에서 잡생각을 해본다. 삼국시대,고려,조선초 까지도 "불전을 장엄하게 하고, 불탑을 만드는 것이 최대 공덕이라고 여겨 경제력만 허용한다면 불전을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 모두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불전을 2층으로 하였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중창을 하는 과정에서 호남과 충청에만 2,3층
불전을 중수하게 된 까닭은 뭘까? 물론 불전에 모신 부처가 크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정의 재정적 지원이야 미미했을테니, 많은 전답을 가진 지주들의 보시가 주요 재원으로 보면 호남과,충청 지역의 백성들이 신심이 더 강했다고 여기면 난 역사소설가 일까?
다소 산만하게 보이는 가람 배치지만 2층 통층의 극락전은 소조불로 알려진 거대한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음,대세지 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으며,덤벙주초에 배흘림 기둥,내부의 고주의 배열과 들보의 조화 등 고건축의 맛을 진하게 우려낼 수 있는 전각인데,난 진한 맛은 고사하고 차려진 밥을 먹지도 못하고 왔으니... (다녀온 후 어떤분의 답사기를 보았더니 기둥의 하나는 칡뿌리 기둥이라 한다)
개울건너에 위치한 산신각을 거쳐, 아무런 장식도,현판도 없는 전각에 덩그러히 걸린 매월당의 영정 앞에서 역사속으로 타임캡슐을 타고 싶지만,저녁놀 무렵의 폐사지를 보고 싶어 산문을 나왔다.
2004.04.19
일주문
차우 김찬균 글씨
한반도지도. 일체유심조를 새겼다.
당간지주
사천왕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
소조아미타삼존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동종
명부전
지장보살
산신각.청한당
매월당 초상화
영산전
영산전 앞.석탑,석등재
부도전
매월당 부도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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