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비
답사 매니아들에게 크게 부각되지 않은 용수사는 도산서원, 육사생가, 퇴계묘, 농암종택, 청량사 동선에 포함시켜도 좋을듯 하다. 온혜리에서 퇴계종택 방향으로 용수사 가는 길가에 하마비가 보인다. 향교,서원도 아닌 사찰 앞의 하마비는 많이 없지만 왕실 원당사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면 용수사도 왕실의 원당사찰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금호비와 관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용수사 개창기를 살펴보면 하마비 설치가 수긍이 간다. 즉 고려 의종의 태실을 묻었던 향복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명종의 명으로 용수사가 원당사찰이 되어 의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신녕군 향복사嚮福寺의 전田 40결과 노비 30구口 및 근처의 묵힌 전田 40결結을 더 지급하며, 이를 좌우가승록사와 여러 담당자들에게 내려 시행하고 바꾸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전의 향복사는 곧 의종의 태를 묻은 곳이었는데 중간에 불이 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토지와 토비를 이 절로 옮겨 주고 의종의 명복을 빌게 한 것이니 (의종의) 영혼이 어둠을 벗어나서 즐거움의 땅으로 올라가는 빠른 길을 만든 것이다. 또한 매년 의종 제삿날에는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고 의식을 행하여 명복을 빌며 매년의 일정한 제도로 삼았다. 이로써 성상께서 불사를 넓히시는 것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고,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이승과 저승을 뛰어 넘음을 알 수 있다."
***용수사 개창비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 있던 용수사의 개창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글. 1181년(명종 11)에 최선(崔詵 : ? ~1209)이 왕명을 받아 지었다. 이 글이 새겨진 비석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탁본이 현재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탁본은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활동한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수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시대에 편찬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대부분이 결락된 채 일부 내용만이 판독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에 이우(李俁)가 비석의 탁본들을 모아 편찬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도 이 비석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에서 찾은 용두산용수사개창기에 의하면 현재 하마비, 금호비, 대웅전 앞의 정혜사지13층탑 복원 사유 등이 짐작이 가지만 어떤 자료에도 그에 대한 설명이 없어 개인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1181년(명종 11) 최선이 건립하였다. 개창기에 의하면 용수사는 고려 의종毅宗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로서 개창되어 명종明宗 대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었다. 사찰의 개창을 주도한 석윤釋胤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문인인 무애지국사無㝵智國師 계응戒膺의 제자이며, 석윤의 제자로서 용수사 주지를 맡은 확심廓心은 의천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인물이다.
개창기에 따르면 용수사 개창 이전 이미 운곡리에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차례 화재로 옛 터만 남게 되었다. 경상북도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주지인 성원이 1146년(의종 원년)에 용수사 옛 터의 남쪽에 암자 몇 칸을 지은 뒤 입적하자,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승 석윤은 1163년(의종 18) 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절을 창립하자는 소견을 개진하였다.
의종은 예종이 응공이란 고승을 위해 각화사를 창건하여 화엄 교리를 폈듯이 자신도 각화사에 못지않은 사찰을 지어 화엄 교리를 펴고자 하였다. 이에 석윤은용두산의 암자를 추천하였고, 의종은 일관인 영위를 보내어 터를 살펴보고 용수사라 사액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증축을 돕게 하여 크게 번성시켰다.
대웅전 앞에 보이는 안강 정혜사지 복제석탑. 무슨 사유로 용수사에 복원 되어 있을까? 근거 없는 이야기며, 어느 곳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개창기에서 그 단초를 발견했다. 물론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고려 명종 재위시 용수사 개창기에는 13층 청석탑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13층 청석탑을 잘못 해석하고 정혜사지 13층 탑을 복원한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청석탑 16기와 더불어 용수사의 한 기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에는 17기 청석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돌아가신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경장(經藏)·율장(律藏)·론장(論藏)과 13층 청석탑(靑石塔) (1자 결락)을 만들었다. 이로서 큰 서원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고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되었다."
검우당 벽화 . 일반적인 벽화와 달라 이채롭다. 더군다나 아래의 벽화들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정수사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의 꽃 공양의 꽃병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향 강우방선생님이 설명하는 만물 생명의 기원인 만병으로 바라보면 일견 수긍이 된다. 일향선생님의 학설에 대해서는 나의 일천한 지식 뿐만 아니라 반대 의견도 많아 여기서는 피한다.
야외 미륵전 전각에 봉안 중인 미륵불. 용수사에서는 개성 영통사 불상으로 탈북민이 모셔왔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언론에는 탈북 1호 불상이라는 자극적인 기사로 보도 되었다. 개인적인 견해는 자제하고 용수사에 모셔진 미륵불로 알려드리니 우리님들 답사시에 참조 하길 바란다.
금호비禁護碑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의 설명이다. “이 산에는 제단이나 옛 절뿐만 아니라 영역 안에 중대한 설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안에서의 모든 출입을 금지하고 보호하도록 한다” 중대한 설이란 풍수와 관련된 설로 생각된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일영(日營)으로 되어 있고, 비를 세운 연대는 신해년 10월이라 되어 있으나 신해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중대한 설? 과 신해년이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자. 이 역시도 근거나 자료 뒷받침 없이 개창기 내용으로 판단한 개인적 인 견해이다.
우선. 태조 왕건과 관련된 내용이다." 산의 남쪽에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의 입구에는 숲이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부르기를 대왕숲大王藪이라고 한다. 대개 우리 신성대왕 때에 땅을 넓히며 남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군사를 멈추고 3일 있다가 떠났다. (그때) 이곳 남쪽의 여러 항복하지 않았던 지역들이 곧바로 도장을 바치며 항복하였다. 지금까지 그 곳에는 큰 나무와 꽃이 많으며 나무꾼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서 신물神物이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두번째. 명종이 의종의 태실을 옮기고 원찰로 삼았는 기록과 관련 설이다. " "신녕군 향복사嚮福寺의 전田 40결과 노비 30구口 및 근처의 묵힌 전田 40결結을 더 지급하며, 이를 좌우가승록사와 여러 담당자들에게 내려 시행하고 바꾸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전의 향복사는 곧 의종의 태를 묻은 곳이었는데 중간에 불이 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토지와 토비를 이 절로 옮겨 주고 의종의 명복을 빌게 한 것이니 (의종의) 영혼이 어둠을 벗어나서 즐거움의 땅으로 올라가는 빠른 길을 만든 것이다. 또한 매년 의종 제삿날에는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고 의식을 행하여 명복을 빌며 매년의 일정한 제도로 삼았다. 이로써 성상께서 불사를 넓히시는 것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고,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이승과 저승을 뛰어 넘음을 알 수 있다."
위 2가지 내용이 기록된 개창기는 고려 명종 재위시의 일이다. 그렇다면 금호비 조성은 명종시절의 신해년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명종21년(1191년)이 신해년이다. 그래서 금호비는 왕건과 관련된 설로 생각되며, 용수사 개창후 10년이 지난 1191년으로 보고 싶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용두산 용수사 개창기비문 해석 천하의 이름난 산은 삼한에 많고, 삼한의 빼어난 곳은 동남지방에 가장 많은데, 동남지방에서 큰 산으로는 태백산이 으뜸이다. 신령한 기운을 많이 품고서 큰 도회를 이루어 대대로 이어지니 어찌 무산(巫山), 여산(廬山), 형산(衡山), 곽산(霍山) 등이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태백산에서부터 남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3백여 리쯤 가다보면 갑자기 우뚝 솟아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이다. 바로 영가군(永嘉郡 : 안동)이 (이 산을) 배후에 두고서 도회지를 이루었다. 무릇 특별한 경치에는 반드시 특별한 일이 있는 법이다.
지역의 [3자 결락] 전하기를 만일 이곳에 큰 절을 세우면 지역 전체가 평안해져서 침략이나 기근의 걱정이 없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앞서서 골짜기 중에 옛 절이 있었는데 여러차례 산불을 만나 모두 불타 없어지고 남은 것이 없었다. 오직 옛 주춧돌만 남아서 잡초 사이에 묻혀 있는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의종(毅宗) 원년 병이년 1146 가을에 각화사覺華寺 주지인 비구 성원이 그 곳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들어하다가 드디어 옛날 터에서 남쪽으로 수백 보(步 : 길이의 단위. 6척(尺)에 해당한다) 되는 곳에 땅을 정하고 처음으로 건물 몇 간을 지었다. 얼마 후에 성원 스님이 돌아가시고 문인인 처이(處彛)가 계승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힘을 다하며 여러 해가 지나갔지만 전후로 지은 건물은 다만 십여 간에 지나지 않았다. 처이는 힘이 다하고 재물이 떨어지게 되자 고승인 윤공(胤公 : 釋胤)에게 돌아가신 스승의 뜻이라고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윤공은 스스로 와서 보고는 마음으로 허락하였다.
그때 윤공은 다섯 번 연이어서 각화사의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갑신년(의종 18, 1164)에 왕명을 받아 대궐로 나아갔다. 임금님께서 조용히 공에게 묻기를 “돌아가신 할아버님인 예종 임금께서는 일찍이 응공을 위해 각화사를 창립하여 화엄교리를 크게 떨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짐(朕)도 그대를 위하여 화엄 사찰 하나를 지어 각화사에 뒤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공이 곧 용두산의 일로 대답하니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곧바로 일자(日者 : 陰陽을 살피는 사람) 영위(榮緯)를 시켜 그 땅을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영위는 그 명을 따른 후 고하기를 “큰 법을 널리 펴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데에는 이땅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용수사(龍壽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지방관에게 그 일을 담당하라고 거듭하여 명령하였다.
드디여 인부를 모으고 자재를 준비한 후 을유년(의종 19, 1165)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법당과 승려의 요사채, 재(齋)를 올리고 강의를 하며 휴실할 곳들을 늘려 짓고, 주방과 창고도 무려 90여 간이나 되었으며 둘러싼 회랑은 1백여 보(步)였다. 사람들은 수고롭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정해진 법도에 맞추니 예전에도 없고 이때에도 없는 훌륭한 일이었다. 이 공사에서는 문인인 운미가 실제로 그 일을 모두 주관하였다. 또한 나무를 새기고 쇠에 칠하여 만드는데 (12자 결락) 각 하나씩으로 감실龕室을 덮고 번당幡幢을 늘어 놓으니 장엄하게 꾸민 것이 눈을 놀라게 하였다. 사찰의 기물과 비축물들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다시 장생고長生庫를 세워 곡물 1천 석을 쌓아두고 해마다 그 이자를 받아서 기름과 향료의 (3자 결락)으로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공의 (3자 결락)을 낸 것과 여러 문도 제자들이 시납한 물건들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계사년(명종 3, 1173)에 공이 갑자기 병에 들어 입적하였는데, 입적하기 며칠 전에 글을 올려 운미를 자신의 후임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또한 뛰어난 제자인 (2자 결락) 확심(廓心)을 추천하여 이 절의 주지를 맡게 하였다. 확심도 또한 뛰어난 승려이었다. 어려서부터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적게 묻고 많이 깨달았으며 재능이 뛰어났다. 이 절에 머무르게 되자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힘썼고 또한 돌아가신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경장(經藏)·율장(律藏)·론장(論藏)과 13층 청석탑(靑石塔) (1자 결락)을 만들었다. 이로서 큰 서원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고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되었다.
이에 무술년(명종 8, 1178) 11월에 임금님께서 차(茶), 향(香)과 축하하는 사소(詞疏)를 보내고 승려 7백여 명을 모아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열고 낙성하였다. 지금 임금님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아홉 번째 해이고 금(金)나라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1161~1189년까지 사용) 18년이다. 얼마 후에 “옛 절의 전시(田柴 : 전(田)은 농사짓는 땅, 시(柴)는 땔나무 할 땅) 10결(結)을 그대로 갖게 하고, 다시 사람은 많은데 먹을 것이 부족하여 오래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 염려되므로 신녕군(新寧郡) 향복사(嚮福寺)의 전(田) 40결과 노비 30구(口) 및 근처의 묵힌 전(田) 40결(結)을 더 지급하며, 이를 좌우가승록사와 여러 담당자들에게 내려 시행하고 바꾸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전의 향복사는 곧 의종의 태를 묻은 곳이었는데 중간에 불이 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토지와 토비를 이 절로 옮겨 주고 의종의 명복을 빌게 한 것이니 (의종의) 영혼이 어둠을 벗어나서 즐거움의 땅으로 올라가는 빠른 길을 만든 것이다. 또한 매녀의 (의종) 제삿날에는 승려들에게 재(齋 : 식사)를 베풀고 의식을 행하여 명복을 빌며 매년의 일정한 제도로 삼았다. 이로써 성상께서 불사(佛事)를 넓히시는 것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고,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이승과 저승을 뛰어 넘음을 알 수 있다.
공의 속성은 원(元)씨이고 이름은 석윤(釋胤)이니 북원(北原 : 강원도 원주) 사람이다. 아버지 충익(冲翼)은 주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가 임신할 때에 마니주를 품는 꿈을 꾸고 (2자 결락) 마음에 이상하게 여기었다. 태어날 때에 남과 다른 모습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나이 겨우 13세에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가지고 부모에게 아뢰니 부모는 이전의 꿈의 징험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안타깝게 생각하여 곧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몰래 집을 나와 치악산 삼천사(三泉寺)의 혜예(慧詣) 법사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아 줄 것을 청하였다. 법사는 부모의 부탁이 아니라 하여 거절하였고, 부모는 백 가지 계책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가 공이 승려가 되어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범패를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부모가 의논하여 출가를 허락하였다.
나이가 어렸지만 뜻은 소박한 것을 좋아하고 계행(戒行)이 뛰어났으니 또한 구마라집 문하의 호련이나 보궤와 같은 제자이고현장 문하의 침단이나이나 난혜와와 같은 사람이었다. 16세가 되어 무애지(無㝵智) 국사에게 의탁하여 가르침을 받아 그 학문을 모두 이었다. 치악산 개선사(開善寺)와 삼각산 청원사(淸源寺) 등의 주지를 역임하고 마지막으로 각화사에 머물렀으니 모두 임금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다. 공은 늘 도를 전하고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므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이 머무는 곳은 저자를 이루었다. 때때로 단월들의 요청에 의해 법회에 참석한 것이 30여 곳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 후에 이름난 사람이 되었다.
공은 머무른 곳에서 언제나 옛 것을 바꾸고 새것을 만들어서 불사(佛事)가 더욱 빛나게 하였다. 또한 여러 산에서 수행하는 곳을 만든 것이 모두 네 곳이었다. 아아! 공은 도의 경지가 그와 같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업적을 세워놓음도 이와 같이 훌륭하니 이를 모두 마땅히 기록하여 후대에 보여야 할 것이로다. 옛날의 일을 기록한 것을 살펴보면 전해들을 것을 믿고 기록할 뿐이었다. 신(臣)의 아버지인 선신(先臣 : 최유청(崔惟淸 : 1095~1174)을 가리킴)께서는 일찍이 공과 친하게 지내면서 도의 요체를 묻고 지내었다. 그때 신은 어린 아이로서 좌우에서 청소하며 가만히 말씀을 듣고 행동하시는 대강을 익숙히 보았었다. 지금 문인들이 기록한 바를 살펴보니 믿고 기록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 일의 시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이상과 같다.
대정(大定) 21년 신축년(명종 11, 1181) 계하(季夏 : 음력 6월) 재생백(哉生魄 : 음력 초3일)에 문림랑 시예빈소경 지제고 사자금어대(文林郞 試禮賓少卿 知制誥 賜紫金魚袋)인 신(臣) 최선(崔詵)이 왕명[宣]을 받들어 짓고 아울러 씀.
201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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