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순창군

순창...순화리 석탑

임병기(선과) 2011. 8. 17.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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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리 3층 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순창여자 중학교 후원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의 탑으로 원래는 중층의 기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는 기단석의 폭보다 약간 큰 대석 위에 4매석으로 된 기단 면석이 올려져 있는 단층 기단이다. 석탑은 고려시대 전 옥천사(玉川寺)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

 

 

옥개석 받침은 5단 받침을 새기고 탑신은 1층에 비해 급격히 높이가 줄어들었으며 우주를 조각한 한개돌로 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북동쪽으로 약 7도 가량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탑이 세워진 지반의 한쪽이 침하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1층 옥개 받침은 별석으로 만들었으며 받침은 5단으로 처리하였고 2층 이상의 옥개석은 하나의 돌을 이용하였다. 옥개석 낙수면의 물매는 깊지 않으며 전각 반전은 부드럽다. 3층 옥개석위에는 하나의 돌에 조각한 노반, 복발, 앙화가 남아 있다.

 

 

4매의 화강암으로 조합된 기단의 면석에는 1개의두터운 탱주와 양우주를 조식하였다. 기단갑석 상면에는 일층 탑신을 받치는 2단의 몰딩처리를 하였으며 일층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조합하였다.  기단 갑석은 하부에 갑석 받침은 생략되었으나 치석의 흔적이 있어 연화문과 같은 장식무늬를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

 

 

1층 옥개 받침은 별석으로 만들었으며 옥개받침은 5단, 탑신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석탑의 전체적인 형식은 신라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여러 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결구방식,  옥개석의 형태가 평박한 점, 옥개석이 합각에서 위로 치켜진 점 등은 백제 석탑의 영향으로 보인다.

 

순창 문화원 홈페이지 순창 전설편을 보자. 옥천사와 관련 무량국사 이야기도 전개되고 순화리탑에 얽힌 전설로 재미있다. 우리나라 많은 사찰에 빈대 때문에 스님이 절을 버렸다는(숭유배불의 영향이겠지만) 이야기는 많지만 탑에 연관된 이야기는 처음 접한 듯 하다.

 

순화리 삼층탑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크거니와 여기에는 토속의 체취가 물씬 나는 전설 한 토막이 전해오고 있다. 시화연풍하여 시주가 구름과 같이 모여든 옥천사는 한때, 매우 번창하여 큰 가람을 이루었다.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절방에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절의 운세가 기울어 마침내는 빈대에 부대끼어 그처럼 성하던 시주도 떨어지고 중들도 다 도망가고 늙은 주지승이 상좌 한 놈을 데리고 겨우 제불전 공양이나 올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늙은 객승이 찾아와 하루밤을 쉬어가는데 그렇게 번창했던 옥천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주지승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5,6년 전부터 난데없는 빈대가 생기더니 그 수가 점점 퍼져서 대웅전 마루방까지 떼이어 나오며, 그렇게 된 후로는 승려도 도망가고 시주도 한 이가 없으니 자연히 빈 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빈도가 불심이 나약하여 이와 같은 일이 생겼으니 대사께서 높은 도력으로 이 절에 빈대를 없애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청원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날 밤에 주지스님과 객승이 한 방을 쓰는데 주지승은 빈대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을 전전하고 있는데 곁에서 잠이 든 객승은 뇌성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바야흐로 꿈의 삼매경을 즐기고 있었다. 하도 이상하여 호롱불을 켜들고 보았더니 빈대들이 객승쪽으로는 한마리도 가지 않고 자기쪽으로만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시각쯤 지났을까. 곤히 잠들었던 객승이 크게 기지개를 펴고 나더니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는데 한 식경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혹시나 칫간에 볼일 보러 갔다가 호식이나 당한 게 아닌가 걱정이 돼 밖으로 나가보니 벌써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새벽을 알리고있는데 별들이 빛을 잃은채 깜밖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 저편에 어스럼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탑모양이 분명하다. 전에 없던 것이어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탑은 탑인데 전에 없던 것이 왜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하고 좌우를 살펴보니얼마전에 자다가 말고 방을 나간 객승이었다. 두손에는 덪가리만한 바윗돌이 한 개씩 들려있고 간밤에 살짝 비가 내려서인지 나막신 차림이었다. 놀라 나자빠진 주지승을 본 객승은 껄껄 웃더니만 주지스님은 공사가 끝났는데 이제야 일어나면 되느냐고 하면서 방에가서 빈대난 한 마리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빈재 한마리를 잡아다 주었더니 객승 하는 말이 " 이 빈대를 탑안에 가두어놓을 터이니 이후부터는 빈대를 두려워 하지 말구 불사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그후부터 옥천사는 빈대 한마리 없는 깨끗하고 쾌적한 절이 되어 전과 같이 거대한 가람을 이루고 장명등 불야성속에 수수백의 승려들 독경소리가 십리 밖에까지 은은히 들렸다.

 

그러나 운세가 다하였음인지 그로부터 백여 년 후 고을 원님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라 손 쓸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원님 꿈에 옥천사 석탑 속에 갇혀있는 빈대가 현몽하여 말하기를 "제가 백 년 동안을 석탑속에 갇혀있으니 그것이 한이 되어 그러하오니 저를 풀어주시면 아가씨의 병이 나을 것이여, 아니면 며칠 안으로 요절할 것입니다"하였다. 더욱 괴이한 일은 하룻밤새 세번씩이나 똑같은 꿈을 거듭꾸고 난 원님은 날이 새자 옥천사 석탑에 대한 연유를 측근에게 물어본즉 과연 빈대와 무관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결심하기를, 우선 딸부터 살려놓기로 하고 군사 수십명을 동원하여 옥천사 석탑의 개석을 열고 보니 놀랍게도 주먹만한 빈대 한 마리가 엎어져 있는데 방금이라도 잡아다 놓은것처럼 펄펄하게 살아있었다. 승려들은 큰일이 났다고 야단들이면서도 관원들이 하는 일이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굿이나 보고 있는 사이에 빈대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후 원님의 무남독녀 외동딸은 병이 나아 일어났지만 옥천사는 또다시 빈대가 성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절을 혁파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혹시 이 전설이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그토록 도력이 높은 객승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순창군지 사암지편을 보면 인계면 개심산에 개심사를 창건한 이는 무량국사이며 그 연대는 835년이다. 옥천사의 삼층석탑을 고려 초기 것으로 본다면 고려 원년이 918년이고 그사이 연차는 많지 않으므로 혹시 유명한 무량국사가 팔도강산을 주유 끝에 이 지역 개심산에 와서 불사를 일으켰으니 의당 옥천사에도 들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무로 어쩌면 그때 그 빈대탑을 하루 아침에 쌓아 올린 객승은 무량국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201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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