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동해시

동해...두타산 삼화사 철조노사나불

임병기(선과) 2010. 10. 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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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 계곡 

 

지난 저녁 지향사 석불좌상과 탑재를 찾아 어렵게 절에 도착했지만 스님도 전혀 모르고 계셨다. 우리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과 관리부재를 새삼 깨닫고 어렵게 여관을 잡았다. 모기가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에어컨의 굉음에 잠자리도 불편했지만 휴가철 바가지 요금을 감내해야 하는 이 현실도 안타깝기는 오십보 백보!!

 

하지만 저녁식사를 위해 찾아간 허름한 식당. 겨우 수족을 움직이는 할머니 혼자서 운영하는 식당의 메뉴는 오직 보리밥 밖에 없었다. 한참후(정말 한참 후였다) 준비해주셨는데 나물이 무려 10여 종류가 넘었다. 토종 된장 맛도 죽여주었고, 막걸리 한 병에 세상에 1,500원 이라니. 인심으로 정으로 식당을 운영하신 것 처럼 보였다. 여관에 가면 심심할테니 할머니는 여물어 먹지 못한다고 삶은 옥수수를 비닐 봉지가 넘치도록 몽땅 담아주어 여행 내내 간식거리가 되었다.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참 고마운 할머니였다.

 

무릉계곡에 대하여 백과사전을 보자. "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으며, 계곡입구의 삼화사에서 상류쪽으로 약 2㎞ 구간에 걸쳐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계곡에는 태암·미륵암·반학대·능암·쌍현암 등의 기암괴석과 시인·묵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武陵盤石) 및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이 계곡 위쪽에는 3단으로 되어 있는 용추폭포가 있다."

 

 

서울로 향하는 옛길이었단다. 두타산의 두타는 불교 용어이며, 무릉은 도교, 아래사진에 보이는 금란정의 금란은 논어이니 묘한 기분이다.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로지 심신을 수련하는 것, 번뇌의 때를 벗고,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말하며 부처님의 십대제자중 가섭존자를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님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금란정. 논어의 금란지교(金蘭之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인다. '금란정'은 한일합방으로 인해 향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분개한 이고장의 유림들이 금란계를 결성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려고 했으니 일제의 방해로 듯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해방후 후손들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원래 북평에 있었으며 1956년 이 곳에 옮겨왔다. 이러한 내력을 알고 나면 북평 출신 최인희 시인의 낙조 시비가 서있는 이유를 이해가 된다. 서해 낙조를 노래한 이태극의 글과 다르게 동해에서 낙조는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지만 너럭바위, 삼화사을 그리고 있다. 

 

낙조(落照)...최인희

 

                                                  소복히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소리

                                                  백암(白岩)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너머 맑은 단청  산문은 틔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무릉반석. 무릉반석은 무릉계곡 초입에 위치한 바위로 수백명이 함께 앉아도 될 만큼 넓으며 옆으로는 무릉계곡의 계류가 흘러내리고 있다. 조선 4대 명필 중의 한 분인 양사언을 비롯 시인 묵객들의 글과 싯구가 즐비하지만 내눈에 선혈이 낭자한 것 처럼 보인다. 

 

냉수와 찬물, 낮잠과 오수, 아줌마와 사모님, 뭐 그런 차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관심없다. 아니 이해 못하니 차라리 이래야 속이 편한가? 
 

 

일주문, 현판은 근세의 선승 탄허선사의 글씨이다. 건너편에서 잦은 수해를 입어 이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나도 일찍 나왔건만 할머님은 벌써 산문을 나서고 계신다. 아마 새벽 예불을 보고 오신듯 하다. 뒷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다.

 

 

1977년 쌍용양회 동해 공장의 채광권내에 들어가자 현재의 위치인 개국사터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원래의 사지(寺址)는 동쪽 1.3km지점에 위치한다. 성장 지상주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가? 그 공장은 몇년이나 가동될까? 그 이후에는 다시 삼화사를 옮겨갈련지 모르지만 가슴이 답답하다. 어디 이런 예가 한 두 곳이어야 말이지!!!!!!!!!!!!!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근자에 조성한 천왕문. 사천왕을 탱화로 봉안 하였다.

 

 

 

 

 

인연이 아닌가? 그믈망속에서 맞이해주었다. 삼화사 홈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地臺石)은 남북으로 장대석(長大石)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枚石)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석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隅柱)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甲石)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分圓)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大基壇)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板石)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別石)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屋蓋)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층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上輪部)를 살펴보면 긴 찰주(擦柱)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보륜(寶輪)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 개의 철환(鐵環)도 남아 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寶柱)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철주가 꽂혀 있다.

 

출처...문화재청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삼화사 삼층석탑이 현재의 장소(중대사터)로 옮겨진 것은 1979년 12월이었다. 삼화사가 쌍용양회의 채광권 안에 위치함으로 해서 더 이상 사찰로서의 역할이 어렵게 되자 1977년부터 이전사업을 시작한 끝에 마지막으로 탑을 옮겨온 것이다. 이때 이 탑은 법당 앞마당이 아니라 화단 왼쪽에 세워졌다. 이 탑을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慈光 遠行)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천년석탑의 자리를 다시 선정했다.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이 1997년 4월초였다.

 

목함내 발견유물...출처/문화재청


삼화사는 먼저 탑이 위치할 장소에 사방 3.2m, 깊이 1m의 흙을 파낸 다음 굵은 마사와 적심석으로 지반을 다진 뒤 기단은 지면보다 약간 높게 하는 기초작업을 했다. 이어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佛臺座片) 2개, 철편(鐵片)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이건될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원행화상이 봉안하고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顆)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내에 봉안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 1277호(1998. 6. 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 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조정된 것은 이절의 철불 제작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탄허스님 작품이며, 1977년, 철불이 노사나불로 복원되면서 대웅전을 적광전 현판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정면 5칸 축면 3칸의 겹처마 다포 팔작지붕으로 심우도를 벽화를 그렸다. 오랫동안 약사불로 알려졌던 철불에서 명문이 남아 있었는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어 금당 현판을 교체하였다.  

 

 

철불에 얽힌 수많은 영험설화가 생겨났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사는 한 농부의 아내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왔다. 온 마을에 전염병에 창궐해 남편이며 자식이 다 죽게 생겼으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빌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고 남편과 식구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전염병은 좀처럼 퇴치되지 않았다. 평소에 약사불을 집안의 어른처럼 공경하고 지내 온 아낙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찌 내 정성을 몰라주나 싶었다.

 

그녀는 생각 끝에 부처님이 평소에 잡숴 보지 못했을 것을 가지고 가서 공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부처님이 평소 쌀밥이며 과일은 많이 드셨겠지만 고기는 한 번도 못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태 한 마리를 사서 절로 가지고 갔다. 아낙은 스님 몰래 법당으로 들어가서 소원을 빌고 명태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아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남편이며 자식들이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집 부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금방 온 마을에 전염병이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다. 이웃 마을에 사는 어떤 새댁은 시집을 와서 아이를 갖지 못해 애를 태웠다. 그녀는 이웃 마을 어떤 아주머니가 삼화사 약사불에게 기도를 해서 영험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절로 찾아가 기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댁이 아주머니를 찾아가 “어떻게 기도를 해서 소원성취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웃으며 새댁에게 슬그머니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부처님도 색다른 음식을 좋아한단 말일세. 그러니 명태를 한 마리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게. 만약 그래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만 받아 자시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더라고 소문을 내 버려. 그러면 부처님이 난처해서라도 어떻게 해줄 게 아닌가.”새댁은 아주머니의 말대로 명태를 실타래에 꿰어서 부처님 목에 걸어 놓고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만약 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를 자셨다고 소원을 내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할 겁니다.”

 

이렇게 불공을 하고 나자 새댁은 정말로 임심을 해서 옥동자를 낳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 소원이 많은 사람들은 스님 몰래 법당에 들어가 명태를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면 열의 아홉은 소원이 성취되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담은 이밖에도 많다. 조선 순조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몽땅 불에 타는 재앙을 입었다. 법당은 다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달아났다. 철불을 지고 몇 발자국 움직이자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성발악을 했다. 도둑은 혼비백산해 철불울 내려놓고 도망을 쳤다. 그후 또 다른 어떤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 왔다. 그는 철불이 워낙 무거워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없자 무도하게 한 쪽 팔을 잘라 도망을 가다가 신장(神將)으로부터 죄를 받아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뒤늦게 불상이 없어진 것을 안 삼화사 스님들이 부처님의 없어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가 이를 발견하고 다시 모셔와 법당을 새로 짓고 봉안해 놓았다. 이 얘기는 <진주지>에도 실려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해 장마가 들어 산사태가 일어나 중대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약사전이 무너지고 약사불도 매몰되고 말았다. 삼화사 약사불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자 중대사로 옮겨 지으면서 이곳에서 모셔 두었는데 중대사가 무너지면서 매몰된 것이었다. 그 뒤 이 약사불은 중대사터에서 밭을 일구던 어떤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삼화사로 옮겨졌다. 삼화사에 철불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날 한 골동품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했다. 당시 삼화사 주지는 성암 화상이었고 신도회장은 김대승 씨였다. 김대승 씨는 부처님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가지고 나갔다. 그 골동품상은 운임이 모자라 철불을 역에 맡기고 돈을 구하러 영주로 갔다.

 

이때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묵호에 주재하고 있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의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운임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취조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철불을 훔친 골동품상은 영주에서 돈을 마련해 돌아왔다가 아내와 함께 철창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화사 철불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견디며 지금도 그 옛날 훤한 장부의 모습으로 두타산에 처음 올 때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으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 부처님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화사에도 오래된 철불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삼화사고금사적》에는 오래 전부터 이 절에서 봉안되어 온 사실을 적고 있다. 또 《진주지》를 비롯한 읍지나 군지 등은 이 철불의 수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선조 임진왜란 때(1592) 병화로 불이 났으나 약사전만이 타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한 경자년(1660)에 중대사 구지로 이건했다……순조 계미년(1823) 9월 8일 불이 났으나 역시 약사전의 철불만 타지 않았다. 그러나 중간에 도둑이 팔을 잘라 도망가다가 숲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 절 스님들이 그것을 수습해서 다시 원래대로 복구했다(《척주지》).

 

이 기록은 삼화사 철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첫째는 이 철불이 개창 또는 그 얼마 후 부터 존재했으며, 둘째는 그 존명은 약사불로 알려져 왔으며, 셋째는 중간에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동해시 지가동에는 지상사가 있으며 이 절은 삼화사 철불과 비슷한 모습의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철불은 제작수법이 삼화사 철불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즉, 서역으로부터 왔다는 기록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지상사 철불과 동시대에 제작, 봉안됐음을 짐작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 불상이 조선 중기 이후 불가피한 사정, 예컨대 전쟁이나 화재로 상당한 수난을 겪었음도 확인된다. 불상의 보존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은 삼화사 철불이나 지상사 철불이 대동소이하다. 다행하게도 이 불상들은 근년에 이르러 다시 원형으로 복구되긴 하였으나 수난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철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 철불이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 태백산지구 조사반이 1967년 12월 제 7차 최종조사를 할때였다. 조사반원은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 김화영 이었는데 진홍섭은〈삼화사의 탑상(塔像)〉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이 철불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안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 높이는 40㎝, 어깨 폭68㎝, 두께는 0.5~1㎝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 오르듯 두드러져 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이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융기된 것같이 보인다. 의문(衣紋)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結帶)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꺾이면서 연장돼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철불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1967년 당시만 하더라도 훼손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 중기 이후로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때는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갈 뻔한 일도 있었다(삼화사 철불의 영험설화 참조). 뿐만 아니라 훼불의 상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대로 법당에 안치하고 불자들의 귀의를 받게 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이 불상은 재발견된 이후 한동안 단칸불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 마침내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1997년 4월 5일에는 이 절의 주지 자광 원행(慈光 遠行) 화상의 원력으로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파불이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원행화상이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는 다름 아닌 불상 배면에 돋을새김으로 남아 있는 명문이었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이 불상의 비밀 몇 가지가 밝혀졌다. 제작연대에 관해 지금까지 이 불상은 제작수법이 측면에서 고려시대 철불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존상의 명칭은 창건설화의 기록에서 보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명문을 세밀히 분석해 본 결과 이 사실이 모두 뒤집혔다. 즉, 불상의 제작연대는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말로 추정된 것이다. 또 제작수법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한 결과 신라하대의 철불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들이 확인되었다. 나발 위에 솟은 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삼도와 통견법의 등은 보림사 철불이나 도피안사 철불과 흡사했다.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작 당시 이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었다. 삼화사 철불은 오래도록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이는 창건설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명문에는 이 불상의 존명이 약사불이 아니라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존명 확인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나말여초(羅末麗初)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문화재급 철불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철불상 존명은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삼화사의 경우처럼 신라말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삼화사 철불의 명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의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파불상태에 있던 불상을 복원해 귀의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그 모형으로 제작해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시켰다.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전이 아닌 적광전(寂光殿)으로 걸었다.

 

 

삼화사 홈페이지를 참조 했습니다.

 20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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