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광주...무등산 증심사

임병기(선과) 2009. 8. 24. 07:46
728x90

 

 

 

어제 저녁 과음으로 컨디션이 난조지만 일치감치 길을 나섰다. 나홀로 답사 동선 수립 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 시간 첫 코스를 사찰로 잡으면 여러모로 효과적이다. 광주에서 가장 큰(?) 사찰인데도 사하촌은 번잡하지 않고 참배객도 드물다.  

 

무등산. 불교의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가져온 산이름으로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의미와  만인 평등을 뜻하는 무등등(無等等)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에게는 수박의 명성으로 익히 알려져있지만  나에게는 소쇄원, 송강정을 비롯 담양 정자권. 개선사지 답사중에 멀리서 바라 보았고 산속으로 들어오기는 처음이다.

 

 

무등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증심사는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 4)에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창건하고, 고려시대인 1094년(선종 11)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살펴보면,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에는 ‘증심사(證心寺)’라 기록되어 있으나, 1856년의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나 1925년의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징심사(澄心寺)’라 적고 있어 언제 어떤 이유로 ‘징심사’라 일컫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혜조국사의 중창 이후 조선시대에는 1443년(세종 25) 김방(金倣)이 중창하였는데, 이 때 500나한과 16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에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분의 선사가 네 번째 중창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한ㆍ일 불교의 공동원류설이 제창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한용운(韓龍雲) 등이, 일본은 염불종ㆍ조동종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된 반면 한국은 임제종(臨濟宗)을 이어받아 두 나라 불교의 뿌리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펼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통을 천명하고 임제종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한국전통사찰정보 

 

대구 사람들에게 팔공산이 늘 그리움으로 다가오듯, 무등산도 고향 떠난 광주 사람들에게 추억의 중심축으로 기억될 것이다. 팔공산 자락 동화사 사하촌은 시 중심가를 방불케하는 상권이 형성되었지만, 무등산 증심사 사하촌은 예상외로 조용하여 그배경을 생각해 보았지만 뚜렷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멋스런 담장과 동화사 통일대불이  풍기는 이미지가 눈앞을 스칠 뿐이다.

 

 

대웅전. 참배객 한 사람 보이지 않은 중정. 근자에 불사한 외관의 대웅전은 2단 축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전각이다. 기둥 위에는 용두를, 내부에는 용꼬리를 걸었다. 벽에는 심우도가 보인다.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 보살이 아닌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석가모니불은 나발,  삼도, 방형 얼굴,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좌측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을 새겼다. 우협시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없지만 관음보살 파트너인 세지보살로 생각된다. 

 

 

대웅전 뒤 동종. 범종각의 새주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 있다. 오히려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텐데...

 

 

 

 

 

지장전 

 

비로전. 대웅전 뒤 위치,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전각. 비로전(毘盧殿)  편액은 초정 권창윤 작품이다.
 

 

비로자나철불좌상. 신라 말에 조성한  철불로 대황사가 안태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나발, 높은 육계, 감은 듯 든듯한 눈 오똑한 코, 삼도, 방형의 얼굴으로 위엄이 가득한 불상이다. 통견의 법의는 어깨를 감싸고 있다. 광배와 대좌는 멸실되었다.  지권인 수인이지만  일반적인 비로자나불과 달리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다.

 

호남 지방에서 철불은  장흥 보림사, 남원 실상사, 해남 은적사에도 보인다. 비록 대황사에서 옮겨왔지만  철불은 통일신라 선종 도입 이후 이후 나타나는 불상으로 증심사를 창건한 철감선사 도윤의 화순 쌍봉사 부도와 오버랩 되었다.  

 

 

오백전.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익공계 전각이다.

 

"조선 세종(世宗) 12년(1443) 증심사를 삼창(三創)한 김방(金倣)이 오백나한과 십육제자상을 조성,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소원하기 위해 지었다. 오백전의 결구 수법은 조선 세종 12년에 건립된 강진 무위사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백전 석가보니불.가섭.아난. 오백나한

 

오백전 앞 삼층석탑. 증심사에 3기 석탑은 신라시대 3층탑. 고려시대 5층탑. 조선시대 7층탑으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면 재미가 있다. 탑신의 체감 비율이 뚜렷하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 양식으로 초층 옥개와.기단 갑석 일부가 훼손되었을 뿐 완전한 모습이다. 

 

 

2기단, 하기단의 안상,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겼다. 옥개받침은 4단, 모서리 반전도 날렵하다.상륜은 노반  위 복발 자리에  옥개석을, 그 위에 방형의 앙화를 두었다. 원래 부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옥개석은 내렸으면 좋겠다.  

 

 

석조보살을 모신 원통전. 석조 보살을 관음보살로 모신다.

 

 

석조 보살입상(石造普薩立像). 담양 서봉사지가 안태고향이다. 전남대에 있는 석탑과 부도가 서봉사가 다시 일어나면 함께 자리하여 이산의 아픔에서 벗어 났으면 좋겠다. 원형의 연화 대좌, 높은 원통형 보관을 착용하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삼도가 보이며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원통형 보관은 강원도 월정사, 춘천 박물관 한송사 보살, 강릉 신복사지 보살 등 공양보살상으로 사굴산문 사찰에서만 보이는 유형이다.  그러나 증심사 석조 보살입상은 전반적으로 간략화되고 퇴화된 조각 기법과 경직된 수인 처리 및 신체의 불균형 등으로 편년을 낮추어 잡는다고 한다.

 

 5층탑.7층탑

 

고려 5층탑. 생채기 심한 기단 갑석위로 연화문이 눈에 들어온다.  몸돌 면석에 사면불,사천왕,팔부중을 모신 경우는 많지만   꽃문양이 그려진 석탑은 처음(?) 접한다. 탑신 비례와 체감을 고려하면 5층 옥개석은 작은 느낌이 들고 몸돌은 다른 석탑 부재 같다. 단층으로 보이는 기단도 처음에는 이층 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1~4층 옥개 받침은 3단. 5층은 2단으로 5층 부재는 의문이 남는다.

 

1933년 탑을 해체복원할때 금동불2구, 5층철탑(19cm), 소형철불2구, 수정1점, 청옥세주(靑玉細珠)23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6.25동란중 국보211호 금동석가여래상(15.9cm), 국보212호  금동보살입상(18.2cm)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조선조 7층탑. 방형 지대석위에 기단 없이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몸돌에 범자(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가 새겨져 있어 범자 7층탑이라고도 한다. 범자가 문양으로 새겨진 경우는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탑의 특징이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위에서 부터 옴마니반메흠을 한자씻 새겼다).  생략된 옥개받침,  간략화된 상륜,  낙수면 물매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산신각.꼭 있어야 할 자리, 그런 모습이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무등산...김규동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

 

2009.07.26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