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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은 656년에 창건된 고찰로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고찰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도선국사가 나한전을 중창하면서 현재도 나한도량으로 유명하다. 또한 금대암을 지리산 절 가운대 최고로 치는 문인 선비가 많았다. 왜일까? 금대암이 자리한 금대산은 덕유산의 한 갈래로,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의 연봉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경치 때문인가? 그 근거는 정토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정토경' 가운데, “염불공덕이 있는 사람은 임종 시 서방의 대성께서 맞이하시는데, 가장 공덕이 높은 사람은 금대에, 그 다음은 은대에 모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때문에 금대암을 최고로 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금대암을 찾은 목적은 동종과 석탑뿐만 아니라 일전에 답사자료를 준비하던 중에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과 탁영이 지리산 탐방길에 순례하였다는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가 배척 당하던 시절 단속사 탐방기에서 일천한 불교지식을 드러낸 탁영이 어떤 표현을 하였던 조선조 선비들에게 금대암은 지리산 답사 1번지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멀리 위쪽 전각이 나한전이다. 점필재가 함양군수 시절 탐방하였다고 한다. 점필재가 이곳을 순례하였을 때는 무오사화를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함양군청 앞 학사루의 유자광 시가 새겨진 현판을 떼어 불질러 버려 훗날 무오사화로 처절하게 복수당하였으니 학사루와 더불어 답사 동선을 잡아도 좋겠다. "문인들의 기행문 가운데 금대암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부터다. 함양 군수로 있던 1471년(성종 2) 제자인 극기(克己) 유호인(兪好仁, 1445~1494), 태허(太虛) 조위(曺偉, 1454~1503) 등과 함께 지리산 유람을 떠났는데, 음력 8월 14일에 환희대(歡喜臺) 바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금대암·홍련암(紅蓮庵)·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가 보인다고 적고 있다. 이 때 김종직은 금대암에 직접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현존 사찰로 금대암이 있었음을 확인 할 수는 있다. 그 다음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가 있다. 1487년(성종 18) 음력 9월 27일 경상남도 진주 단속사(斷俗寺)에서 출발한 여정이 10월 4일에 금대암에 닿았는데, 금대암이 자리한 뒷산을 금봉산(金鳳山)이라고 한 점이 눈에 띤다. 지금은 금대산이라 하고 있는데, 15세기에는 금봉산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한국사찰정보 금대암 전나무. 두그루가 나란히 서이었으나 최근에 낙뢰로 부러지고 수령 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점필재 탐방길에 동행했던 뇌계 유효인(兪好仁, 1445~1494), 이 쓴 시(詩)중에 “잘있느냐 금대절아 송하문(松下門)이 옛 같구나, 송풍(松風)에 맑은 꿈 깨어 잠꼬대를 하는구나 ”라는 내용이 있어 이 전나무는 당시의 나무로 추측된다. 금대암 조선시대 범종. 용통이 남아 있고, 종뉴에는 용 머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상대에는 7자의 범어를 새겨 넣었다. 상대와 떨어진 종신에는 유곽과 유두 9개씩 두고 사면에 합장하는 보살상을 새겼다. 몸체 명문에 1734년(영조 10)에 산청 쌍계사에서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신중탱. 대웅전 법당 마루 한 켠에 걸려 있으며, 위태천을 비롯한 여러 신중들이 간결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는다. 화기에 의하면 1785년(정조 9)에 그렸다고 한다. "기행문 가운데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것은 1489년(성종 20) 문신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지은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이다. 그는 평생의 지기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함께 지리산 탐방을 시작하여 음력 4월 15일에 금대암에 닿았다. 그가 금대암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달음에 금대암에 이르렀다. 한 승려가 나와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정백욱(정여창)과 함께 불쑥 경내에 들어섰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는데, 반쯤 시들었어도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납의를 걸친 승려 20여 명이 가사를 입고 뒤따르며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도량이라고 했다. 정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精一)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갈 뿐 물러섬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경각시켜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하지요.’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해나간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정오가 되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出一步到金臺菴 一僧出汲 余與伯勖 率爾而入 庭中有牧丹數本半謝花甚紅 百結衲子卄僧 方荷袈裟 梵唄相逐 回旋深疾 余問之 云 精進道場也 伯勗頗解之曰 其法精而無雜 進而不退 晝夜不息 以爲作佛之功 稍有昏惰 其徒中捷者一人 以木長板 拍而警之 使不得惱睡 余曰 爲佛亦勞矣 學者於作聖之功 做得如此 則豈無所就乎 菴有六環錫杖 甚古物也 日亭午 由舊路而返)"...한국전통사찰정보 나한전 뒤쪽 공간의 커다란 바위 위 삼층탑. 바위를 탑의 기단부로 삼았다. 몸돌에는 우주를 새겼고, 층급은 3단이며 낙수면도 완만하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끝에서 살짝 반전이 보인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개가 남아 있다 조선초의 탑으로 추정한다. 나한전에서 바라본 원경. 나는 이런 풍경에서는 늘 조선 제일의 풍류객 임백호가 떠오른다. 답사를 다녀온 몇일후 우리카페 어느님과 문자를 주고 받다가 임백호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님들도 익히 잘 알지만 임백호는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무덤을 찾아 시조를 헌시하고 꽃다운 영혼을 위로한 사람이다. 훗날 관원 몸으로 기녀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는 죄목으로 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서도병마사 자리를 면직 당하고 말았다는 내력이 전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리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그님이 나에게 물었다. 정말 임백호가 풍류객이었을까요? 내속내를 들킨듯하여 항복!! 이라고 했더니 진작에 그러시지 자기가 한우가 되어 주겠단다(캬캬캬캬) 한우(寒雨)는 평양의 명기(名技)였는데 임백호가 그녀와 주고받은 다음 시조가 『백호집(白湖集)』에 전하고 있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백호의 이와 같은 시조를 받아서 한우(寒雨)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여기서 '찬비'는 한우를 두고 읊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와 같은 백호 임제의 은근한 소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기생 한우의 솜씨 또한 멋지지 않은가? 한참 농짓거리하고 있는중에 다른 님으로 부터 사찰관련 시는 어느사이트에서 찾는지 문자가 들어왔다. 답을 주기전에 내가 그랬다. 나 오늘 한우와 놀고 있다고 했더니, 그대는 임백호가 되시고 자기에게는 소세양 같은 멋진 분 소개해달란다.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달빛아래 오동잎 모두지고 서리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 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임 보내고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소세양이 황진이에게= 달빛아래 소나무만이 푸르고 눈에 덮인 한포기 꽃들은 고개를 떨구었구나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슬픈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술은 그저 강물에 흘러갈뿐 흐르는 강물은 나의 마음을 실어보내 주지않고 저 멀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한포기 꽃은 아름다운 낙화를 보여 주는구나 내일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되어 나의 몸을 짓누리리라. =황진이 답서= 소솔한 달밤 무슨생각 하시온지 뒤채는 잠자리는 꿈인듯 생시인듯 님이시여 제가 드린말도 기억 하시는지 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멀리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모자란듯 하루 하루 이몸을 그리워 하시나요 바쁜중에도 돌이켜 생각 함이란 괴로움일까.즐거움일까 참새처럼 지져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 하신지요. 가끔 종자기와 백아의 만남이 그리울때가 있다. 지음의 경지가 아니면 어떠리!! 깊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유쾌해지고, 짧은 문장으로도 이해되는 그런 만남이... 2008.04.13 |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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