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양평군

양평...제안대군 태실.태비

임병기(선과) 2020. 8. 9.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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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대군 아기태비

옥천면 옥천리 509-6  민가 부근 주차 후 산으로 개설된 임도를 따라가면 이릅니다.

 

태봉

태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아기태비만 태실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기태비

대석, 비수도 갖추지 않은 조선 전기의 유형입니다.

 

(전)왕세자남소손태실 王世子男小孫胎室

익숙지 않은 명문으로 후면의 세운 날짜를 확인하면 태주를 찾을 수 있습니다.

 

(후)성화 2년O월20일 입석 成化 二年 O月二十日 立石

세조 12년(1,466년)에 세운 아기태입니다.

 

왕세자남 王世子男

세조 재위 시 왕세자는 예종으로 남(男)은 아들을 뜻한 것 같습니다.

 

소손 小孫

세조의 어린 손자 의미입니다.

 

태주

세조의 손자이며, 예종의 아들입니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아기씨비

 

우선, 조선왕조 실록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2월 13일 을유 4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세자(世子)의 소훈(昭訓) 한씨(韓氏) 【곧 지금의 왕대비(王大妃)이다.】 왕손(王孫)을 낳았다

 

1,466년 2월에 태어난 소훈(昭訓) 한씨(韓氏)는 안순 왕후(安順王后)입니다.

1471년(성종 2)에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고, 1497년(연산군 3)에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책봉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의 "곧 지금의 왕대비(王大妃)이다." 기록으로 미루어 세조실록은 1,471년 이후에 발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종반행적(宗班行蹟)]에 의하면 성화병술(1466년)二月十三日 창덕궁 수강전에서 출생하였다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서삼릉태실연구소)

성종실록 2권, 성종 1년 1월 15일 갑오 4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아들 이현(李琄)을 봉하여 제안 대군(齊安大君)으로 삼았다.

 

탄생 4년 후 제안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런데, 제안대군의 졸기가 흥미롭습니다.

 

중종실록 56권, 중종 20년 12월 14일 무술 7번째기사 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제안 대군(齊安大君) 李琄" 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항렬 높은 종실(宗室)이 죽어 내가 매우 애통스럽다."

하고, 특별한 부의를 내리고 널을 가려서 주도록 하였고 예조로 하여금 시급히 장사에 관한 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또 현이 후손이 없으므로 이천정(伊川正)이수례(李壽禮)로 상주를 삼도록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현은 의 아들로 성격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성화 2년O월20일 입석 成化 二年 O月二十日 立石

1,466년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

 

이름은 현(琄). 자는 국보(國寶). 예종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韓氏)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였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아직 어리고 총명하지 못하다고 반대하여 대신 성종이 예종을 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1470년(성종 1)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져 녹봉(祿俸)과 직전(職田)을 지급받았으며, 후일 세종의 제 5자인 평원대군 임(平原大君琳)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12세에 사도시정(司䆃寺正) 김수말(金守末)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하여 내쫓긴 바 되어, 14세에 다시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김씨를 끝내 못잊어하자 1485년 성종이 복합(復合)을 허락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안순왕후의 상을 입은 뒤부터는 홀로 거처하였으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다만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音律)을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그를 평하여 “성품이 어리석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는 또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결국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세력과 훈신(勳臣)의 각축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다음 백과)

 

 

20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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