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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면 봉두리 새출 마을. "약 400여년전에 연주인 현순창延州人 玄舜昌이 첨사 벼슬을 마치고 입향하여 살았으며, 약 300년전 경산인 이취신京山人 李就新(호 石軒)이 판관벼슬을 마치고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덤개) 암포岩浦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선비가 글을 가르치고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출발한다 해서 새출 또는 사치士致로 부르게 되었다."고 성주군지에 기술되어 있다. 바위는 한강 정구 선생을 배향하는 회연서원 뒷편 무을 구곡 1경인 봉비암으로부터 이어지는 대가천변 새출 마을 입구에 있었던 장방형의 자연 암반으로 성주댐 건설로 수몰 한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근에 백운정 선바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30호 국도 개설로 바위의 많은 부분이 매몰된 상태라고 한다. 동제바위 틈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수령 200년 이상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는 신성목이다.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우리의 전통을 지켜온 근간으로 믿기에 수령의 과학적 근거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리라. 새출 주민들이 매년 정월 초사흗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동제를 봉안한 장소이어서 동제바위로 불리었다고 한다. 현재는 바로 옆에 목장승이 서 있으나 도로 확포장 이전에는 마을 입구 좌우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장승으로 인해 장승바위로 불리기도 했다. 장승, 바위는 우리내 민초들의 민속신앙으로 오랫동안 면면히 계승되는 당신앙의 대표적 사례이며, 농경시대 촌락 배치의 전형이었다. 삼거리에서 경환청둥오리식당을 경영하는 사장님의 말씀에 다르면 장승의 본래 위치는 동제 바위 앞 개울쪽이며 수몰되기전에는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장승, 동제바위를 지나, 조산을 거쳐 마을로 들어 섰다고 한다. 금물동장군. 금물서장군 금물今勿? 경향각지의 장승을 뵈었지만 처음 접하는 이름이다 검색하면 큰마을, 지금은 없어진 등의 뜻이 나오지만 명쾌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장승을 세운 스님을 탐문 하였지만 전화번호도 등재되지 않은 사찰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방위 신앙으로 이해된다. 경환청둥오리식당 새출마을 토박이 사장님께서 동제바위와 장승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마을을 떠난 출향민이 봉안한 동대장군, 서대장군. 안태고향은 수몰되었지만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삼거리 식당 건너편, 생수정 약수터 옆 조산터 칡넝굴로 덮힌 이곳에 성주댐 조성으로 사라진 조산이 있었다고 한다. 기자, 제액, 벽사, 풍수비보, 풍요, 이정표, 유사시 군사적 목적 등의 다양한 상징으로 조성된 조산은 돌탑, 성황당으로 불리운다. 현재 성주군에는 초전면 월곡에 조산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나, 원형질을 품고 있는 새출에도 조산이 조성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새출의 조산 조성과 관련하여 대구매일산문 "상생의 땅 가야산" 기사에는 위의 목적이 아닌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촌락 배치의 전형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조선 중기 이 마을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산 동래부사를 제수받아 사또로 부임했다. 임지로 내려가보니 고을 백성들은 흉년에다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 탐관오리들을 없애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민들은 그 선정에 대한 보답으로 공덕비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그후 동래부사를 역임한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성주의 동네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려 했다. 하지만 장지로 택한 곳이 산세가 악한 곳이라 성처럼 축대를 쌓아야 했다. 축대를 쌓으려면 많은 돌이 필요하고, 또 돌을 운반해야 하는 거리도 매우 멀었다. 작은 동네라 인부도 넉넉지 못해 주민들은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장례를 치른 후 축대를 쌓기로 결정하고 상여를 운구해 장지에 오니 동네 사람도 아닌 많은 이들이 장사진을 이뤄 돌을 나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녀자들도 섞여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매우 궁금해하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동래부중에서 왔소이다"고 대답했다. 이어 "우리 사또께서 동래부사로 부임하셔서 우리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선정을 베푸셨으니 우리들이 가서 그분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논이 되어 이렇게 와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해질 무렵에 축대가 완성됐고, 축대를 쌓고 남은 돌을 바위 옆에 모으니 큰 조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이 곳이 의미 있는 곳이라 하여 장승을 세우고 바위에서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한 선비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은 백성들이 만들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조산옆 약수터. 생수정 봉두산 봉황산 사연은 알고 있지만 언급을 피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긴다. 멀리 지난 사연을 품고 있는 가야산 정상 칠불봉이 아련하다. 2015.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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