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보은군

보은...여적암 다층탑

임병기(선과) 2012. 8. 1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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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암은 법주사의 산내암자로 1694년(숙종 20) 여적 경수(汝寂慶秀)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로는 그전부터 있던 절터에 여적 스님이 절을 짓고 수도를 했으므로 여적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렇듯 여적암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을 뿐 정확한 문헌적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창건 이후의 연혁도 뚜렷하게 전해지지 않으며, 근대에 들어와 1901년 당시 주지였던 응익(應翊) 스님이 강문환(姜文煥)의 시주로 중창을 하였다.

 

 1909년에는 응익(應翊) 스님이 다시 신사림과 임남용(林南龍)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하고 삼성각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중창의 기록은 여적암보다 100m 아래에 있는 옛 건물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남북으로 길게 축대가 쌓여져 있어 눈으로도 옛 건물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건물터의 오른쪽 끝에는 커다란 암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대한융희삼년기유(大韓隆熙三年己酉:1909년)”년에 기록한 “법당중창공덕기”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법당을 중창하는데 공덕이 있은 시주자들을 기록한 것이다"...전통사찰관광정보

 

 

삼존불

 

 

목포 유달산 88불 중의 18불로 보인다. 일제가 유달산에 있었던 108암자를 폐하고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기위해 조성했다는 설도 보이지만 아래 자료를 참고하길 바란다.

 

일본인들이 세운 유달산의 88불이란 무엇인가? (자료제공: 목포문화원) ...한국석불문화연구원

 

목포가 개항된 후 일본인들의 불교가 목포에서 성행하게 되었고, 그들이 숭배하는 승려의 모습을 유달산에 새겨 놓기도 하였다. 그것이 유달산 일등봉 바위아래 현존하는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암각이다. 이외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유달산에 88개의 불상을 세워 일본불교의 성지로 조성하였다. 이를 “유달산팔십팔영장(儒達山八十八所靈場)”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 일본 밀교를 전파한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 일본 밀교를 전파한 홍법대사는 일본에서 시코쿠 지역을 순례하며 88개의 사찰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금 일본 승려들의 수행코스이자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목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를 축소 재현하여 사찰대신 88개의 불상을 유달산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유달산 내에 이 88개의 불상은 광복 후에 종교적인 이유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모두 파괴되거나 도굴되어서 현재는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던 그 터와 파편들만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외부로 유출된 유달산의 88불 중 일부가 다른 곳에서 간혹 발견이 되고 있다. 88기 불상의 크기는 1미터 내외 정도로, 불상의 받침부분에 일일이 번호를 새겨 놓았고, 번호 밑에 그 불상을 시주한 일본인의 이름과 현재 거주지, 일본 내 출신지를 표기하였다. 그 내용들을 보면 목포에 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인 강진, 영암, 해남을 비롯해서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유달산 바위에서 바로 조각을 한 것은 아니고, 외부에서 만들어 와 가지고 바위 위에 고정시켜서 세워 놓았음을 그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도 유달산을 등산하다 보면 일등봉부터 이등봉에 이르기까지 이 불상들이 안치되었던 장소의 흔적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유달산의 88개 불상을 순례하고, 맨 마지막에 일등봉 바위 면에 새겨진 홍법대사상 앞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왜 하필 유달산에 이런 유적이 조성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개항장으로 활용되었던 곳이 목포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유달산이 일본 불교의 성지로 여겨질 만한 무슨 특별한 의미 부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

 

 

다층 청석탑

 

 

 

"여적암다층청석탑은 대석을 포함한 현재 높이 2m로서 지면에 높직한 화강암 석재 2단을 놓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화강암의 초층 옥신석을 얹었다. 옥신 좌우에는 우주를 목각하였으며, 옥개는 점판암으로 조성한 8매의 방형 지붕동 만을 첩첩이 쌓았다. 12층의 옥개 落水面에는 伏蓮이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노반과 보륜이 있다.

이 탑과 유사한 탑은 보물 제518호 海印寺 願堂庵多層石塔과 도문화재자료 제56호 忠州 蒼龍寺多層靑石塔 등 8基가 지정되어 있다. 탑의 형태와 연꽃문양과 탑재질(청석)이 같을 뿐만 아니라 크기와 조각수법이 비슷하게 보인다.

규모는 높이 129㎝(탑신부 52㎝, 상륜부 50㎝, 기단부 27㎝), 우주석 폭 1단 54㎝, 2단 52㎝, 3단 47㎝, 4단 43㎝, 5단 41㎝, 6단 39㎝, 7단 38㎝, 8단 35㎝이다.

청석탑은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특이한 형태의 석탑으로 실제조사된 것은 전국적으로 10기가 넘지 않는다. 그것도 옥개석 몇 장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법주사 汝寂庵多層靑石塔도 조성 양식으로 보아 대략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연꽃 문양이 조각된 갑석형(甲石形)과 옥개석 네 귀퉁이 전각에 풍경공이 있으며 탑신석이 남아 있는 상태로 학술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문화재청

 

 

의성 대곡사. 동화사 염불암. 해인사 원당암. 김제 금산사. 창녕 법화암. 진주 두방사. 원주 입석사. 원주 보문사. 영월 무릉리.고령 박물관. 충주 창룡사. 아산 세심사. 보은 여적암을 뵈었으니... 우리 나라 다층청석탑의 화룡점정일까?

 

 

여적암은 법주사 산내암자 가운데 가장 부유한 암자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흉년이 들어 다른 암자에서 양식을 빌리러오면 역대 주지스님들은 냉정하게 거절하며 지독히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자린고비 같은 암자의 주지스님에게는 총명한 어린 상좌가 하나 있었다.

 

꽃이 활짝 핀 봄의 어느 날 어린 상좌는 주지스님에게 봄놀이를 가자고 졸랐다. 그러자 평생 일만하고 놀이라는 것을 몰랐던 주지스님은 깜짝 놀라 응하지 않다가 워낙 상좌가 졸라서 겨우 허락을 하고 말았다. 어린 상좌는 놀이를 가려면 밥을 넉넉하게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서 주먹밥을 아홉 개를 만들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밥이 아까워 놀이를 갈 수 없다고 하였지만 상좌의 성화에 못 이겨 법주사와 속리산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수정봉으로 향하였다.

 

수정봉에 도착한 어린 상좌는 주먹밥 하나는 주지스님께 주고는 옆의 구멍 뚫린 바위로 가서는 역대 주지스님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주먹밥을 한 개씩 던졌다. 그랬더니 구멍에서 큰 뱀들이 차례로 나와서 받아먹고는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덟 번째 부른 이름은 전대 주지스님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 본 주지스님은 놀라 상좌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좌는 “이 분들은 역대 우리 암자의 주지들로써 너무나 욕심이 많아 죽어서 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절의 재물을 잊지 못해 이렇게 절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수정봉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여기 남은 한 구멍은 바로 주지스님이 죽어서 살 곳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주지는 크게 깨닫고는 자신의 탐욕을 버렸다. 그리고 절에서 큰 법회를 열어 절의 재물을 전부 나누어 주고 수행에만 몰두를 하였다고 한다. 주지스님의 탐욕심을 깨닫게 한 이 어린 상좌는 바로 여적(汝寂)이라 했으며, 그 후로 암자는 상좌의 이름을 따서 여적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201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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