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기백산 용추사

임병기(선과) 2012. 2. 11.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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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기후와 일정을 고려하여 대대리마애불과의 인연은 다음으로 미루고 함양문화유산해설사로 계시는 세 분과 용추사 입구에서 4년만에 해후를 했다. 두 분은 구면이었지만 눈썰미가 부족하고 기억력이 둔화되는 탓에 얼굴마져 가물가물하다. 정확히 내얼굴을 기억하는 분에게 미안스럽게도 키가 170CM 아니었나요? 라고 뜬금없이 엉뚱한 멘트를 작렬하는 나를 인간적으로 받아주었을까?

 

산문밖 부도전의 조선시대 부도. 중창 불사가 있었던 영조 재위시절 전후의 부도로 보여진다. 부도마져 부질없는 사치로 생각한 주인공의 바람과는 달리 유골을 수습하여 부도를 세운 후학들이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고 법명을 새기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뷰자데라고 했던가? 1979년 경에 용추사를 들렸었는데 용추 폭포를 비롯 진입 동선이 전혀 기억에 없다.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 현판으로 용추사가 장수사 옛터임을 보여준다. 장수사는 신라 소지왕 9년(487) 각연대사가 창건,  한국전쟁 때 전화를 입어 1975년에 복원했으며 용추사 옛 진입로 조계문은 숙종 28년(1702) 호남사혜가 세웠다고 한다. 덤벙주초 위에 굵게 정제되지 않은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었다. 용추사 사세와 비교하면 큰 편에 속해 조선조 장수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문을 복원한 도편수의 일화도 재미 있다. "목수가 몇날 며칠을 나무 토막만 내고 불사에 진척이 없어 하루는 스님이 목수를 시험하고 싶어서 목재 하나를 몰래 숨겼다고 한다. 다음날 목수가 연장을 챙겨 떠나려 하여 스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목수가 잘라 놓은 부재 한 개가 부족하다며 이런 정신으로 일주문을 세울 수 없다"고  자기 탓을 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내공의 도편수였던 모양입니다.

 

 

용추계곡 주변은 수려한 자연 경관, 깊은 계곡, 풍부한 수량, 접근의 편리성으로 함양군에서는 자연휴양림을 조성하여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용추사 초입 길 옆에 보이는 산에 매의 형상을 닮은 매바위가 있다.

 

동행한 해설사분의 설명으로는 조선 건국시에 정도전과의 알력으로 도망다니던 무학대사가 매의 부리가 응시하는 곳에는 꿩도 숨기 좋은 터가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 곳에 은신암을 세우고 중앙정계를 벗어나 한세월 보냈다고 한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은신암을 복원하여 이당저당 온갖 무뢰배들을 이곳에 강제수용하면 용추계곡의 오염이 염려 되지만 여의도는 깨끗해질텐데.

 

 

함양팔경의 하나인 용추계곡의 용추폭포는 예로부터 화림동.원학동과 더불어 안의삼동이라 불리었던 심진동천 용추사 아래에 위치한다. 폭포의 규모로 미루어 여름날 수량이 넘칠 때는 폭포수 소리에 스님의 독경소리는 물론이고 산사의 한적함 마져 삼켜버릴 것이다.

 

많은 사찰 창건 설화에 악용을 몰아내고 교화했다는 설화와 달리 용추에 살았던 이무기는 덜 떨어진 이무기로 승천하는 날짜를 잘못알고 하루전에 하늘로 오르려다 벼락을 맞고 떨어져 다시는 용이 되지 못했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이 재미있다.스님들과 범부들에게 조급함을 경계하고 끝없이 수도정진하라는  함축성을 지닌 설화로 여겨진다. 아무튼 우리 선조들은 경관이 좋은 곳을 이른바 동천洞天이라 명명하고 바위에 각자를 새기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사는 천상의 세계를 동천이라고 불렀기에 그 유래가 도교에서 발생된듯 하지만 나에게 근거는 없다.

 

 

정월 대보름 법회중이어서 대웅전 부처님은 뵙지 못했다. 전해오는 사적을 살펴보자. 용추사는 487년(신라 소지왕 9년) 각연대사가 옛 장수사를 창건하여 부속암자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로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고려 말 자초(1327∼1405)스님이 중수하고 수도처로 삼았으며, 1681년(조선 숙종 7년) 운흡스님과 수오스님이 절을 아래쪽으로 옮겨 중창하였다. 1684년 문찬스님이 법당을 지었고, 1685년 문감스님이 불상을, 이영생이 시왕상을 각각 조성했다. 1686년 김상운이 누각을 짓고, 1687년에는 지찰스님이 팔상전, 천왕문, 요사채를 각각 세웠다. 1734년(영조 10)에 화재로 여러 전각이 불에 탔으나, 호경스님과 두인스님, 영우스님 등이 대부분의 건물을 복원하였는데, 이때 「묘법연화경」등 불경 100여 권을 새로 찍었다고 한다.

 


함양 용추사 건륭18년 천룡탱 ...문화재청
 

함양 용추사 천용탱 아래 사진 영정과 함게  요사옆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으며 유리창문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설명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화면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천룡탱은 건륭 18년, 즉 조선 영조 22년(1753)에 금어 관동·유택·준행 등이 참여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저본채색(苧本彩色)이며, 본지의 가장자리에 주선(朱線)을 둘러 화면을 구획하고, 주선 외측에는 백색안료를 일률적으로 바르고 있다. 가로로 긴 장방형의 화면 중앙에 천룡이 합장한 채 서 있고, 그 양측으로 각각 3명의 권속이 위치하고 있다. 천룡신의 육신부는 백색안료를 전체에 바르고 담먹선으로 육신선을 표현하였으며, 눈썹·수염 등은 녹청안료를 두텁게 발랐다.

 

눈의 표현은 상검선은 농묵세선으로 한줄 긋고, 하검선은 담묵세선으로 눈머리와 눈꼬리만 표현하였다. 홍채는 담먹을 바르고 농묵으로 동공을 찍고 윤곽선을 잡았다. 입술은 윤곽과 상하경계 없이 주색으로 나타내고, 코는 담먹선으로 한 줄 그어 묘사하고 농묵으로 콧구멍을 그렸다. 착의는 머리에 날개 달린 투구를 쓰고 갑주를 착용하였다. 어깨의 견갑부분과 허리에 걸친 갑옷은 금박으로 표현하였는데, 착의에 사용한 주된 채색은 주색·청색·백군·백색과 금박 등이다. 천룡 권속들의 육신은 주색을 약간 가미한 주구 바탕에 담먹으로 바림하여 주름살과 근육에 음영을 살려 표현하였고, 머리·수염·눈썹은 전체적으로 담먹을 바른 후 그 위에 농묵세선으로 모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대웅전 옆 삼성각 후불탱이 사찰에서 흔치 않은 목각탱이다. 중앙은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칠성여래, 좌우에 독성,산신을 봉안하였다. 어느 지역 답사 때 사찰해설사로부터 들은 귀한(?) 19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박장대소 하셨던 함양분들도 사찰 명부전 해설시에 유용하게 활용하였으면 좋으련만. ㅎㅎ

 

 

복장기에 의하면, 조선 1694년(숙종 20)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시왕상의 화려한 모습과 의자의 용두와 봉황두 장식으로 보아 16세기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장보살상은 등을 세우고 얼굴을 약간 내민 상태의 가부좌 모습으로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으며 제1지와 제3지를 구부려 맞대고 있다. 얼굴은 가늘고 긴 눈, 우뚝 솟은 콧등이 특징적이다. 목은 짧으며, 삼도는 얇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가장 바깥에 대의를 걸쳤는데 오른쪽 어깨를 가린 반단 형식이며, 다시 대의 아래에 편삼을 입었다. 대의는 목의 좌우측에서 계단식의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U'자형으로 벌어진 법의 사이로 가슴 밑 부분 승각기로 보이는 수평선상의 띠가 보이는데, 오른쪽 발바닥 끝 부분만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군의자락은 가부좌한 양측 다리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벌어지듯 표현되었다.  도명·무독귀왕과 시왕상은 여러 부위를 조립하여 연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시왕상들은 족대가 붙은 의자에 두 다리를 걸치고 정면을 향한 자세로 표현기법이 거의 동일하다. 머리에는 꽃·동물·원추형을 장식한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홀을 들거나, 수염을 만지거나, 경서를 들고 있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장방형에 가깝고 가늘며 코는 옆에서 보면 매부리코처럼 보이며, 귀는 귓밥이 상당히 두툼하고 민둥하게 처리하였다. 의복은 오른쪽 어깨에 옷을 여미기 위한 장식이 부착되어 있으며, 가슴 아래에 폐슬(蔽膝)과 전수(前綬)를 두른 모습이다. 시왕상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가지런히 내리는 것이 보통이나 제4왕은 코끼리를 밟고 있고, 제7왕은 사자를 다리 아래에 두고 있어 특이하다...전통사찰관광정보

 


용추사 지장보살상...문화재청

 

명부전 불사 이전의 모습으로 보인다.

 

 

보호각.신장탱과 영정이 모셔져 있지만 유리창으로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영정은 각연대사 영정(覺然大師影幀), 무학대사 영정(覺然大師 影幀), 청허대사 영정(淸虛大師影幀), 송운대사 영정(松雲大師影幀) 등 총 4점이다. 화면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초상화는 건륭 46년, 즉 조선 정조 5년(1781)에 화사(畵師) 성민(性玟)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과 설명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고려 말∼조선 초의 명승인 무학대사(1327∼1405)의 초상화. 아마 무학대사가 은신암에 머물었다는 사적으로 인해 조성된 듯 보인다.

무학대사의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고, 용문산에서 혜명국사에게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에서 입적하였다.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고 있으며 족대 위에 발을 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이다. 왼손에는 불장자의 봉을 쥐고 있고, 오른손은 불장자의 수술을 쥐고 있다. 얼굴색은 황백토를 바르고, 윤곽선은 옷주름선보다 가는 먹선을 사용하고 있다. 수염과 머리부분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한 뒤 가는 선으로 먹점과 백색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승복은 남색과 먹을 혼합한 어두운 회색이고, 가사는 주색이며, 그 이면은 황토색이다. 옷주름선과 의자는 대체적으로 엷게 채색되어 밑그림선이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화문석을 깔아 바닥과 배경을 구분하였는데, 화문석 바탕은 호분을 칠한 후 가로로 엷은 갈색과 죽도로 세선을 그어 묘사하고, 가장자리는 주색을 바르고 먹선으로 처리하였다.

 

함양 용추사청허대사  영정

 

조선 중기의 고승인 청허대사(1520∼1604)의 초상화. 청허대사의 자는 현응이며, 호는 청허이고, 다른 이름은 서산대사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아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 1,500여명을 모아 활약하는 등 전쟁에 공을 세웠다.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족좌대를 하고 있다. 왼손에는 짙은 갈색의 염주를 쥐고 있고, 오른손은 의자의 손잡이를 살짝 쥐고 있다. 얼굴색은 황백토를 바르고, 가는 먹선으로 육신선을 표현하고 있다. 수염과 머리부분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한 후 가는 선으로 먹점과 백색점을 찍어 표현하고 있다. 승복은 남색과 먹을 혼합한 어두운 청회색이며, 가사 표면은 주색이고 그 이면은 황토색이다. 옷주름부분과 의자 손잡이는 엷은 채색으로 밑그림선이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화문석을 배치하여 배경과 구분하였는데, 화문석은 바탕에 호분을 바른 뒤 가로로 옅은 갈색 혹은 죽도로 세선을 그어 결을 나타내고 있다.



함양 용추사 송운대사 영정

 

조선 중기의 고승인 송운대사(1544∼1610)의 초상화. 송운대사의 자는 이환이며, 호는 사명당·송운·종봉이고, 다른 이름은 사명대사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순안에 가서 휴정과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강화사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아왔다.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족좌대를 하고 있다. 왼손에는 불장자를 어깨에 걸친 채 쥐고 있고, 오른손은 의자 손잡이 부분을 살짝 쥐고 있다. 얼굴부분은 황백토를 칠했으며, 윤곽선은 가는 먹선을 사용하였다. 머리부분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하고, 그 위에 가는 먹선과 백선으로 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승복은 남색과 먹색을 혼합한 어두운 회색이며, 그 위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을 장식하였다. 입고 있는 옷과 의자는 대체적으로 엷게 채색되어 밑그림선이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화문석을 배치하여 바닥과 배경을 구분하였는데, 화문석은 바탕에 호분을 바른 뒤 가로로 옅은 갈색 혹은 죽도로 세선을 그어 결을 나타내고 있다. 배경은 녹청색 바탕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을 가득 메워 장식하였다.



함양 용추사 각연대사 영정

 

용추사의 전신인 장수사를 창건한 각연대사 초상화.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족좌대(足座臺)를 하고 있다. 왼손에는 불장자를 쥐고, 오른손에는 불장자 수술을 쥐고 있다. 얼굴색은 황백토를 사용하였고, 윤곽선은 가늘고 엷은 먹선을 사용하고 있다. 수염과 머리부분의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한 뒤 가는 먹선과 백선을 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승복은 남색과 먹색을 혼합한 회색이고, 가사 표면은 주색이며, 그 이면은 황토색이다. 옷주름은 밑그림선이 심하게 노출되게 표현하였다. 화면 아랫부분에는 화문석을 배치하여 배경과 구분하였는데, 화문석은 주색과 먹으로 테두리를 하고 호분을 칠해 표현하였으며, 가로로 옅은 갈색, 혹은 죽도로 세선을 그어 결을 표현하였다.

 

용추사 초입에서부터 앞서가던 50대부부의 행보로 웃음을 지었었는데 나오는 길에도 용추폭포에서 정월 보름 기도를 마친 후 두 분이 들어올 때와 똑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앞서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남편은 시종일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고 반면에 부인은 무거운 배낭을 매고 양손에 돗자리와 제물을 들고 미끄러운 눈길을 조심조심 걷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처음에는 남편을 욕하는 분위기 었으나 나중에는 부인이 멍청하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우습게도 두 분이  타고 떠나는 차량이 대구 번호판이어서 나까지  덤으로 고약한 남편 부류로 낙인 찍혀 버렸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두 그루 전나무가 눈에 잡힌다.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 마치 성과 속, 이승과 저승의 대비라는 느낌이 들면서 불현듯 신라향가 제망매가를 읊조리며 서라벌 사천왕사를 배회했던 월명사 스님이 떠오른 까닭을 모르겠다.

 

    제망매가(祭亡妹歌)... 월명사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음에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 세계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201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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