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제주

제주...추자도 처사각.산신당.순효각

임병기(선과) 2025. 4. 28. 07:03
300x250
300x250

추자도 순례 목적이 최영장군 사당 금표 답사이었으며, 18-1 올레길 주변에 있는 문화유산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검색하여 인지한 처사각, 산신당, 순효각을 마지막으로 트레킹과 더불어 짧은 시간에 주만간산으로 둘러본 추자도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처사각. 제주시 유형문화유산

처사각 내부

영모재와 밀양박씨 호남시조처사각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부분 자료에는 태안 박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75년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처사()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박인택은 태인() 박씨로 조선 중기에 추자도에 유배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그의 행적에 대해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당초에는 지금의 사당이 있는 뒤편 산기슭의 석간수()가 흐르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말년에 가서는 현재 사당이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추자 입도() 태인박씨의 시조가 된다.

 

이 사당은 한식 기와지붕에 제단을 마련했는데, 건물이 노후하여 1955년에 지붕을 스레이트로 개조했다가 현재는 다시 기와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외벽은 잡석 쌓기로 마감하였다. 창호는 정칸에만 설치했는데 띠장을 3개씩 고정한 판문이다. 바닷바람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처사각 안쪽에는 중앙에 감실을 만들어서 이곳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감실 상부에는 ‘영모재()’라는 현판을 걸었고, 그 앞에 ‘밀양박씨호남시조처사묘()’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처사각에서 바라본 추자항

추자도 쌍룡사 검색 중에 찾은 자료에는 박인택이 추자도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물이라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정확한 생애가 전하지 않지만 국가 유산청 홈페이지에도 그런 자료(처사 박인택은 조선 중기에 추자도로 유배와 불교적 생활을 하면서,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 교리도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가 실려 있습니다.

처사각 옆으로 난 길을 올라서서 데크로 오릅니다.

산신당 가는 길

산신당

보호각 속에 바위를 산신당으로 모셨습니다.

산신당 신위

전형적인 마을신앙의 상당신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을 신앙은 뒤편 산속에 상당을 마련하고, 마을에 하당을 갖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을 동제(당제)도 제관이 새벽에 상당에서 모신 후 마을로 내려와 당제를 모셨습니다. 이제는 시나브로 잊히고 있지만...

 

예전에 공부했던 기억을 더듬었는데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실린 최영장군 사당 자료에 제 기억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 영흥리 뒷산 높은 곳에 산신당이 있고, 대서리 바닷가에는 해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서리 뒷동산에 최영장군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무속 신당의 기능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으니 산신당-장군당-해신당의 구도가 갖추어진 셈이다. 실제로 상추자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는 산신제-장군제-해신제를 차례대로 지내 왔다."

산신당에서 바라본 추자항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최영장군 사당 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칠월 보름날과 섣달그믐날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를 지내 왔다. 이를 대제(大祭), 사당제(祠堂祭) 또는 당제(堂祭)라고 한다. 대제는 본래 여름철인 칠월에 지냈다. 추자도는 여름철에 멸치 어장이 형성되고,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이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선주들이 윤번제로 사당을 관리하고, 제비도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오늘날에는 수협에서 사당의 관리를 맡고 대제와 관련한 제반 사항도 도맡아 하고 있다. 수협(水協)에서 대제를 맡으면서부터 제일을 봄철인 음력 이월 보름날로 옮겼다. 택일하여 날이 좋지 않으면 길일(吉日)로 바꾸어 제사를 지낸다. 제사 시기를 바꾸게 된 까닭은 주요 어족자원이 조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며, 조기의 성어기가 봄철이기 때문이다.

과거 주민들이 제사를 맡아 지낼 때는 제주(祭主)를 한 사람 정하였다. 제관은 축관 한 명과 제관 한 명으로 구성하였다. 제관들은 제주의 집을 제청으로 삼아 일주일 동안 정성을 들였다. 그곳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제물을 비롯한 제반 음식을 마련하였다. ‘큰새미’라고 하는 샘에 3~4일 동안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금하고, 그 물을 떠다가 제사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였다. 제장에도 금줄을 쳐서 부정한 이의 출입을 막았다. 희생으로 소 한 마리를 올렸으며, 통째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올리되 고기는 삶고 내장은 생으로 올렸다. 기타 제물로는 메, 갱(쇠머리 삶은 물), 어물(삼치, 도미, 갈치, 방어, 조기 등), 나물(시금치, 콩나물, 산나물, 듬북기, 녹두나물), 시루떡 등을 올렸다.

한편 신위의 양쪽에는 작은 그릇에 장군과 똑같이 제물을 차려 올렸다. 이것은 호위병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돼지고기는 제물로 올리지 않았다. 음복은 제관과 참례자들이 함께하였으며, 남은 음식은 땅에 묻었다. 근래에는 최영 장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어업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도 함께 지낸다.

영흥리 뒷산 높은 곳에 산신당이 있고, 대서리 바닷가에는 해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서리 뒷동산에 최영장군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무속 신당의 기능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으니 산신당-장군당-해신당의 구도가 갖추어진 셈이다. 실제로 상추자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는 산신제-장군제-해신제를 차례대로 지내 왔다.'

순효각

지극한 효행을 실천한 박명래(朴明來)의 행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현장 안내문

현판

(향우 비문)

어버지에게 꿩을 얻어드리고, 어머니에게 손가락을 꾾어 피를 먹여 수명을 연장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좌 비문)

사림이 추천하여 도백이 포상하였다는 내용과 귀감으로 삼아 비에 새겨 영원히 잊지 말자는 글을 새겼습니다.

기원후 소화오년 경오이월이십구일

이런 사례가 있었나요?

일반적으로 崇禎紀元後(숫자)(갑자. 연월일)를 기록하는데, 일본 연호인 昭和와 庚午 갑자를 새겼습니다.

어쨌든 소화 오년은 1930년입니다.

배면

도백(목사?)이 순시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고 포상하였다는 사실과, 속수 삼강록에 등재되어 있다고 세명의 아들이 세운 것 같습니다.

 추자항 선착장에 전시 중인 사진

아이들이 입은 옷을 보면 겨울이며, 풍어제와 동제를 올린 후 마을을 돌고 있는 걸궁패의 행렬 같습니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거론하면 비현실적인 꼰대의 망령이라고 지탄받겠지요?

 

추자도 트레킹과 그렇게게도 원했던 최영사당 금표 답사를 옛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2025.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