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25. 1. 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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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서너 차례 답사는 혼자이었는데

오늘은 동호회 30명이 넘는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갈항사지는 익히 아실 테고,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합니다.

석조여래좌상. 보물

등에는 광배홈이 있습니다

하대석.하단석

안상. 화문

상대석

석탑지

갈항사지 동서삼층석탑(758년).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석탑기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는 1914년에 알려졌다. 석탑기는 4줄로 새겨져 있으며, 글씨 모양은 해서체이고, 글씨 크기는 자경 6㎝이다. 판독문과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년에 세워졌다.]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오라비와 자매 세 사람의 업(業)으로 이루었다.]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오라비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법사(言寂法師)이었으며,]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왕의 어머니였으며,]

妹者敬信太王妳在也[작은 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이모였다.]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의 내용에 의하면, 758년(천보 17, 경덕왕 17)에 오라비인 영묘사 언적법사와 큰누이인 조문황태후와 작은 누이 등 3인이 석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가 죽은 뒤에 받은 추존 시호이므로, 칭호로 볼 때 석탑기가 새겨진 것은 석탑이 세워진 해인 758년보다 약 30년 뒤인 김경신이 왕으로 즉위하여 어머니를 조문황태후로 추봉한 뒤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덕왕 대에 동·서 삼층석탑을 세우고 원성왕 대(785~798)에 석탑기를 새겼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갈항사는 승려 승전(勝詮)이 692년(효소왕 1) 창건한 이후 2차례 정도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석탑을 건립한 758년, 두 번째는 석탑기를 새긴 원성왕 대에 중창되었을 것이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갈항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 보물. 국립대구박물관

다라니경도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갈항사지 석탑 기단 중석.

직지사 성보박물관 야외에 4매가 있습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불두 후보

대좌 뒤집힌 상대석?

아니면 하대석

광배 홈이 없습니다.

2004년 답사기는 이렇게 맺었습니다.

 

"철제울타리에 갇힌, 멸실된 불두를 새로 조성한 비로자나불 앞에서 근거 없는 내 생각이 옳지 않을까?라는 건방을 떨고 있는 중에 인기척이 보여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목탁을 쥔 스님이 갈항사에서 나를 향해 내려오고 계신다.

 

글쎄다. 중국의 소상팔경 명승지 영향으로 조선 천지에 **팔경이 없는 고을이 없지만, 성질 더러운 나와는 늘 부조화였지만, 겨울 해 질 녘에 인적 없는 갈항사지에서 목탁을 쥔 스님의 출현은 뒷골이 쭈뼛거릴 만큼 쇼킹한 아름다움이었다.

 

정중히 예를 갖추고 인사를 드렸더니,  추운 겨울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셨냐며 웃음 지으신 후, 전각 안의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예불을 올리신다. 절집에 울리는 염불은 자주도 들었고, 동참도 했었지만 폐사지에서 염불은 처음 아닌가? 아니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스님의 등을 보며 합장한 체 폐사지에 낮게 깔리는 염불소리에 젖어들었다.

 

갈항사지는 해 질 무렵 13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신라불교 황금기의 현장을 거닌다는 착각에 마냥 젖고픈 절집이다. 기회가 된다면 저녁 5시 전후에 들리시면 폐사지에서 스님의 염불에 빠져 들 수도 있을 것이다."

 

2024.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