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제주목 관아.돌하르방
제주목 관아
조선시대(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官衙施設)이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관부(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양식(樣式)으로 복구(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文化層)과 함께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연희각(延曦閣)·우련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礎石·基壇石)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考證)과 자문(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30만 특히, 제주역사의 정체성(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해 준 제주시민의 혼(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진해루
외대문은 문헌에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진해루(鎭海樓)"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하며,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3년), [탐라방영 총람](1760년대)에 목관아 정문으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총 18칸으로 나오며,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진해루
향 우측에 위치
수령이하계하마 守令以下皆下馬
군뢰청.호적방
중문
우련당(友蓮堂)
1526년(中宗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敵)이 침입하여 성(城)을 포위(包圍) 하거나 화재(火災)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楊大樹)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平地)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楊大樹)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되었다.
1694년(肅宗 20) 9월에는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중건 (重建)하였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 (亭子)를 중수(重修)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改名)하여 공물(貢物)을 봉진(封進)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즉, '향의실기(享儀室記)'에 의하면, {서경(書經)} 낙고편 (洛誥篇)에"공물(貢物)을 바치는 데는 의식(儀式)이 많은데, 의식(儀式)에 바치는 물건의 정성(精誠)에 미치지 못하면 공물을 잘 바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을 향(享)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는 것을 의(儀)라 하니, 이에 그 집의 편액(扁額)을 고쳐서 향의(享儀)라 한다고 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1평)이다.
홍화각(弘化閣)
예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뒤 1648년(仁祖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肅宗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防禦使)가 중수(重修)하였고 1829년 (純祖 29)에는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개건(改建)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기문(記文) 으로는 '고득종기(高得宗記)'와 '김진용중수기 (金晉鎔重修記)', '이원조중수기(李源祚重修記)' 등이 전한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훼철(毁撤)되었으며, 현재 고득종(高得宗)이 쓴 '홍화각(弘化閣)'이란 편액(扁額)과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새겨진 현판(懸板)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되어 있다. 본 현판(懸板)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연희각(延曦閣)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 6∼1640. 9) 의 시(詩)가 부기(附記)되어 있고 또 이 때 목사의 겸직(兼職) 이었던 절제사(節制使)가 방어사(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의 겸직은 1642년(仁祖 20)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1713년(肅宗 39)부터 다시 방어사라 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은 1884년(高宗 21)에 홍규(洪圭) 목사가 중수(重修)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36.63㎡(41.33坪)이다.
귤림당(橘林堂)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 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心神)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創建)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1743년(英祖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改建)하였고, 1769년( 英祖 45)에 다시 중수(重修)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1842년(憲宗 8)에 다시 중수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공포는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면적은 9㎡(2.72평)이다.
망경루(望京樓)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金秀文) 목사(牧使)가 창건(創建)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李 土寅) 목사가 개건(改建)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朴宗柱) 목사가 중수(重修)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신종익(申從翼) 목사가 이 누대(樓臺)에 좌탑(坐榻)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훼철(毁撤)되었다.
오점(吳霑)과 김양수(金亮洙) 상량문(上樑文)이 전해온다. 탐라순력도 체험관 1층 내부공간에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를 테마로 한 역사 체험공간을 조성,1700년대 조선시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방어유적 진상 등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면서 보여주는 여러상황들을 각각의 그래픽패널 및 영상물을 통하여 당시 제주의 생생한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해 볼 수 있다.
영주협당(瀛州協堂)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 이었다.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 (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人이 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御使)가 조정 (朝廷)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군관들이 왕래할 때에는 항상 말(馬)이 지급(支給)되었으나 사사로이 말(馬)을 소지(所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832년(純宗 32)에 한응호(韓應浩) 목사(牧使)에 의해 중건(重建)되면서 공제당 (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7.7㎡(32.58평)이다.
돌하르방
제주 읍성에 있었던 하르방으로 2011년 제주국제공항에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 옮긴지 10년이 지났건만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제주공항에 자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어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민원 내용
제주 답사를 다녀 왔습니다. 몇 번 망설임 끝에 글을 올립니다.
왜? 다른 지역 문화재 관련 여러 번 민원 제기하면 " 곧, 예산 확보 되면 조치하겠다는 " 답변은 금방 돌아 오지만, 조치되는 경우를 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관광의 메카인 제주도 문화유산 홈페이지의 오류를 발견하고도 그냥 넘어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헛된 정보 때문에 피해를 볼 것 같아 올립니다.
**돌하르방
전체적으로, 사진을 업데이트하고, 본래 위치, 설명문을 다시 정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제주시
1. 연번 170~171 돌하르방 위치. "박물관"으로 표기. 제주도에는 박물관이 너무 많습니다. 자연사 민속박물관 명기 요망
2.연번 178~181 돌하르방 위치. 제주대 정문, 현관으로 표기, 제주대 박물관 입구로 옮겼습니다
3. 연번 183 돌하르방 위치. 미표기. 제주시청으로 표기 요망
4.연번 186~187 돌하르방 위치. 제주 공항관리공단으로 표기. 현재 제주목 관아로 옮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5. 연번 215. 이조여래좌상
6. 연번 216, 월정사 소장 불상 연번 215의 이조여래좌상과, 연번 216의 석조여래좌상(문화재 자료 4-1)은 동일 불상입니다.
이조(소조)인지, 석조인지요? 215에는 지정 번호가 없고, 216에는 사진이 없습니다.
조치 요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돌하르방(1)
돌하르방(2)
돌하르방(옛 답사기에서 가져옴)
조선 시대 제주현, 정의현, 대정현 성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석상石像으로, 마을, 성 수호신, 벽사, 성주민들의 안녕, 풍농, 이정표 기능을 상징하고 있어, 육지의 마을 장승, 사찰 장승, 성문 장승과 동일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돌하르방은 우석목, 무성 목, 벅수 머리, 장군석, 옹중석 등으로 지칭되었으나 해방 후에 돌하르방으로 불려지다가 1971년 8월 26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서귀포 문화대전에 의하면 제주에는 총 48기 돌하르방이 조성되었으나 제주성 돌하르방 1기가 분실되고, 2기는 1960년대 국립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주에는 45기가 남아 있으며, 정의현성에는 12기가 있다.
돌하르방의 기원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남방 기원설, 제주도 자생설, 몽골 유풍설 등 세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돌 하르방의 조성시기
김석익의 탐라 기년(1918년)
"1754년(영조 30년) 목사 김몽규 설 옹중석어 성문 외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돌하르방을 세우다"
다른 의견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1754년 목사 김몽규가 제주성 바깥에 조성하였으며, 정의현 돌하르방도 동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제주의 돌하르방
http://제주의 돌하르방https://cafe.daum.net/_c21_/bbs_nsread?grpid=dRVf&fldid=MebK&contentval=0005R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37&searchlist_uri=%2F_c21_%2Fcafesearch&search_ctx=LrpNuZSucOsx.YncUoV2ej_tRpHqkOL1hFNwnK7pMwx2pUU9oYvq-CADq-lzJK_pvUKb7yb4c6zjTiqtpKnSCNifajP7gdnedVUvl41NBoCU-C.634PqdBf_BhqbsuaQ-pFrGhQkNdeb-seb-zWjlJwV8_2Au6PT9SG55J6mBk9XukuW4jJrNjfM7anwRQZA5_Xad5vN6RJW3ZQV36C5ICoAeAntYp1TlhD4_2XOFIMiKgVJ4nz8dLH9yWmGLFZjwFgN-Lk7hpywM7T-XLOJFLzpSfRaS5kmVYP3xmLyGSOmFIooR5gGkh-zzps-iSwqu288s79CsKxMdpJISfjMVg00
2021.06.16
*** 제주목 관아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발췌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