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구미시

구미...금오산성. 암각문.마애비

임병기(선과) 2020. 2. 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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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문(금오산성 북문)


금오산

답사꾼들에게는 발품에 비해 가야산, 월출산,속리산에 견줄만한 불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애여래입상은 꾼이라면 건너 뛸 수 없는 옛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력적인 답사처 입니다.


오늘은

2019년 우리곁에 나투신 마애선각여래좌상,예전에 지나쳤던 마애비와 암각문을 살펴보려고 홀로 대혜문을 들어 섰습니다.


2008년 10월 25일 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998



금오산성金烏山城

(출처.디지털칠곡문화대전)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처음 금오산성을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나타나 있지 않아 불확실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천혜의 요새인 금오산에 피난, 왜구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아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고 추정된다.


조선 중종조의 기록에 의하면 금오산은 고려 때에는 남숭산이라 불리었고, 선산부의 남쪽 43리에 위치하여 서쪽은 개령, 동쪽은 인동, 북쪽은 부(府)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금오산성은 석축의 둘레가 7,644자[尺], 높이가 7자이고, 그 절반 이상이 암벽으로 이루어져 몹시 험준하고 고려 말에 선산, 개령, 인동, 성주 등의 많은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았으며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수비했다고 하니 고려 말에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조선조 『태종실록(太宗實錄)』권19 1410년(태종 10) 3월 병인(丙寅)에 수축(修築)이라 기록된 점과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선산부조(善山府條)에 “金烏山城 善山 府及 開寧 仁同弁 石築 始築年月未詳 永樂癸巳 太宗 十三年 改築 周 8025尺 7寸 高 7尺 三軍倉 三池二泉 冬夏不渴”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고려시대의 성터가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여 년간 문헌상에 나타난 기록이 없어 수개축(修改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실상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4년 뒤인 1595년(선조 28)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 이는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글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 중 영남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596년(선조 29) 11월 초 우의정이원익이 강원, 충청, 경상도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장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 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路)의 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성,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성,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 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1596년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으로 짐작되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06년(선조 39)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4월부터 빈집을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문루(門樓, 西門), 포루(砲樓, 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었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1606년(선조 39)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 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 1,730보(步)나 되었다. 그 후 30년 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후에 민족 사상 최대의 치욕인 병자호란을 당하자 또다시 국방상의 요충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미 호란 이전부터 군제의 개편, 수도 피란처인 남한산성의 수축 등의 국방 대책이 추진되어 왔으며 호란 이후는 청(淸)과의 강화조약이 있었음에도 왜구 대비의 구실 아래 주요 산성의 수축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39년(인조 17) 7월에는 경상감사 이명웅이 왕의 윤허를 받아 선산부사 이각으로 하여금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이때 수축된 금오산성의 규모는 내성의 석축 둘레가 7,644자, 높이가 7자, 무성절벽(無城絶壁)이 661보(步)이며 성안에 7개의 못, 1개의 계수(溪水), 8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으니 내성은 국초에 수축된 규모와 동일하나 4개의 못과 8개의 우물이 증설되었다.

외성은 둘레가 4,135자 높이가 14자로 이 외성이 인조 17년에 가축(加築)된 것이며 속읍은 개령, 금산, 지례의 세 읍으로서 각기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고 있어 춘추로 합동 훈련이 이 곳에서 실시되었다. 이로 보아 국초에는 내성만 존재했고, 이들의 외성은 1639년에 비로소 가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조 대에 이르러 국방 시책이 다시 거론되어 축성, 해방(海防), 병제, 군기 등의 개선과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시책의 일환으로 1735년(영조 11) 선산부는 우병사영(右兵使營) 관하의 독진(獨鎭)으로 승격되고, 선산도호부사는 무3품으로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금오산성 별장(別將)을 겸하게 되었으며 진보(鎭堡)의 사속(史屬)으로 진사(鎭史) 5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10명이 배치되었다. 당시 금오산성진(金烏山城鎭)의 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위와 같이 거진(巨鎭)으로 체제를 갖춘 금오산성은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와 군기고가 있었고, 이 대혜창에는 쌀이 2,561석, 조가 1,608석, 피가 약 497석 정도 보관 되어 있었다다.

정조 대에도 국방의 요새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778년(정조 2)에는 사직(司直) 윤만동이 영남의 산성과 함께 금오산성의 중요성을 소론(疏論)한 바가 있고, 1787년(정조 11) 9월에는 삼남 암행어사 김복성의 암행복명시에 왕이 금오산성의 송금상황(松禁狀況)을 하문한 기록도 보인다.

김복성의 답을 보면 금오산성의 산림보호는 잘 되고 있으나 개령현민의 무소(誣訴)로 보호 경계가 축소되어 진민(鎭民)의 원성이 크다고 보고함에 그해 10월 대신들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영의정 김치인은 금오산성은 국방상의 요충이므로 산림보호를 엄중히 해야 할 터인데 송금(松禁)한 계를 축정(縮定)하여 진졸(鎭卒)로 하여금 금양(禁養)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도신(道臣)의 순찰시에 형편을 살펴 선처하도록 분부 할 것을 주청하여 왕은 이를 재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국방의 관액(關厄)으로서 끊임없이 관심이 기울어져 그 기능이 계속되던 금오산성도 순조 이후 진관체제(鎭管體制)의 해이와 더불어 그 가치가 쇠퇴하기는 했으나 산성의 군액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말까지는 그 기능이 존속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대혜문 성벽



내성

오늘은 등산로를 벗어나 내성의 흔적을 찾아 정상 현월봉에서 내려오면서 산정상 부근으로 이어지는 내성으로 하산하였습니다.



내성



내성



해운사(2008.10.25)


금오산성에 관한 이야기는 접고

암각문과 마애비 마애석조여래좌상, 마애여래입상, 약사암 코스를 오릅니다.



대혜폭포大惠瀑布

(출처.디지털구미문화대전)

산성 안에는 1595년경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어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였고, 그 곳에서 형성된 폭포를 대혜라고 하였다. 또 그 물이 여울을 이루어 구미 지방의 용수 공급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대혜폭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명금폭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35년쯤 경상북도 도지사인 일본 사람이 이곳을 찾아 주변 경관과 물소리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사물은 희미한데,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하고 자기의 시상(詩想)이 사라지기 전에 석수(石手)를 불러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겼다고 한다. 그 후로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오늘날 명금폭포라고도 불리고 있다.



암각문

구정칠택(築 金烏城 穿 九井七澤)



대혜폭포 향우측 도선굴 방향에 위치



선조 병신(宣祖 丙申)

선산부사 배설(善山府使 裵楔)

축 금오성 천 구정칠택(築 金烏城 穿 九井七澤)


특히 설楔과 칠택七澤은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1596년(선조 29)

선산부사 배설이 산성을 수축하고 9개 연못 7개를 조성했다는 기록 입니다.


배설裵楔(1,551~1,599)

몇해전 영화 이순신에서 영화사와 문중간에 이견이 있었던 주인공 입니다.

여기서는 생애에 관해서는 생략합니다.



대혜폭포에서 할딱고개 등산로

데크가 설치되어 예전보다 등반이 용이하였습니다.


오늘은 도선굴을 패스 합니다.




고사목에 장승을 새겼군요





빙벽



삼거리

정상으로 향하는 길, 오형탑,마애보살입상으로 진입하는 등산로가 분기되는 삼거리에서 바라본 조망



마애비 2기

삼거리 바위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별장 국후 윤신 애휼비 別將 鞠 侯 允臣 愛恤碑

경자 사월 일 庚子 四月 日


백성들을 구휼한 별장 국윤신을 기리기 위한 비석


국윤신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고 심충성군은 경자년을 1,840년으로 비정하였습니다.)


다만, 향우측 위에 위치한 절제사 박중규 애휼비 건립연대(1,782년)를 고려하면 1,840년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2기 비석이 동일 장소에 새겨져 있을 때는 위의 비석이 선대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자 사월 일 庚子 四月 日




선산부 절제사 박중규 애휼비 善山府 節制使 朴重圭 愛恤碑

임인 사월 일 壬寅 四月 日


절제사 박중규가  백성을 구휼하여 세웠다는 비석 입니다.

1,782년  4월에 새김.


박중규 부사의 재임기간이 1701(숙종 27) 310~ 1702(숙종 28) 629일까지이며 애휼비는 그 이후에 새겼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선산부사가 절제사와 금오산성 별장을 겸한 시기가 영조조인 1,735년 이후이므로 임인년은 1,782년으로 추정 됩니다.

(고 심충성 군은 임인년을 1,722년으로 비정하였습니다)




마애비가 새겨진 삼거리 거대 암벽입니다.



오형탑 烏亨塔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손자를 기리기 위해 공들여 세운 돌탑이라고 합니다.



오형탑



마애여래입상

12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마애여래좌상

2019년 우리 곁에 나투시었으며,

오늘 산행의 주목적이 불상을 배관하는 것 입니다.



석간수

마애보살 입상, 마애선각보살좌상과 무관하지 않을 샘터 입니다.



뿌리가 노출된 나무



마지막 약사암으로 향하는 구간

대부분 산행객들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하산 중이었는데...


나는

엉금엄금.






약사암 종각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삼성각.석문



성장 정진행 城將 鄭鎭行

자 동선 子 東善


삼성각 뒤에 위치

새긴 시기가 없습니다.



현월봉으로 향하는 데크



동국제일문 東國第一門

약사암 일주문 입니다.


마애여래입상으로 진입하면 일주문은 마지막으로 만나게 됩니다.





완전한 금오산성 답사가 되려면 성안과 습지를 경유하는 것이 원안이나  오늘은 선각여래좌상을 뵙는 것이 목적이어서 현월봉에서 돌아 내려왔습니다. 다음에는 산성 답사만을 위한 기회를 도모해야 겠습니다.


약사암,마애여래입상,마애여래좌상 답사기가 이어 집니다.


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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