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원성왕릉.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8. 10. 3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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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 답사의 필수 코스인 원성왕릉

겂없이 시건방지게 쓴 아래의 옛글(2006년)로 대신한다.

그나저나

서역인을 금강역사상으로 보는 논문이 있다고 들었는데 읽고 싶다.

 

(전)원성왕릉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는 이 괘릉은 봉분과 그 전방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은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각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탱석(撑石)을 배치했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며,그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호석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으로 조성하였다.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는데, 현재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2단으로 끼웠던 난간살대는 거의 유실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이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다.『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인상

 

 

문인상

 

 

사자상

 

 

 

 

 

 

 

 

원성왕.

신라 38대


재위 785∼798.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또는 知烏夫人) 박씨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혜공왕 16),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때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선덕왕 1)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주원은 김경신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높았다. 김경신은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침 선덕왕이 죽자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했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양자 사이에 왕위계승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은 국학(國學)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下代) 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형(典型)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791년 1월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義英)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다시 793년 2월 의영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俊邕 : 뒤의 소성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준옹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彦昇 : 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하대는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원성왕계로 특징지어진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며,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 身空詞腦歌>를 지었다.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또는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묘정은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라한테서 얻은 구슬을 당나라 황제에게 빼앗기고 난 뒤부터, 묘정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설화가 이를 알려준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碧骨堤)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다. 이는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다.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遺命)으로 봉덕사(奉德寺) 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었던 인겸과 의영과 예영(禮英)이 있었고, 두 딸로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이 있었다....출처/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석

석탑 기단 중대석(?)

 

 

 

십이지상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

 

 

 

서탑

 

 

기단부

 

 

상층기단 팔부중

 

 

 

 

 

탑신석

4면에 문비

 

 

 

 

4개의 풍탁공

 

 

 

4단 옥개석 층급받침

 

 

 

 

 

동탑

수리중

 

 

 

기단부

동탑과 동일

 

 

상층기단 중석의 팔부신상

 

 

 

 

 

탑신.문비

 

 

 

탑신

양우주

 

옥개석

층급 4단

탑신괴임 2단

풍탁공 처마 4개, 내림마루 2개

 

 

풍탁공

 

 

내림마루의 2개 풍탁공

귀꽃을 장식했던 홈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숭복사지에서 금속 귀꽃이 발견되었기 대문이다.

 

 

 

찰주공

 

 

 

 

계단 소맷돌

 

 

대숭복사지비(2015년 복원)...출처/다음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의 문집 사산비명 四山碑銘중에 숭복사비 崇福寺碑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885년(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 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 崇福寺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전한다.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는 과정과 함께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과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2018.10.13

 

아래는

2006.10.3일 글이다.

괘릉. 김주원릉.갈항사지 탑 명문 사진은 업데이트했다.

 

유년의 기억.

나에게는 기억과 더불어 음악을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포항에서 오신 님들이 숭복사지에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부터 나훈아의 감나무골 노래가 입속을 맴돈다.

'재 넘~어 감나무골 오시려나 달빛에 젖어'......

 

숭복사지. 삼국유사와 최치원의 숭복사 비문에 의하면 선덕왕 시절 현재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에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고 했는데 원성왕 사후 현재 위치로 옮겼다. 경문왕 재위시 원성왕 원찰이 되면서 사세를 넓혔으며 헌강왕 시절 대숭복사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폐사지 답사.

사계절 다 좋지만 무엇보다도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완전한 픽션임을 사전에 밝혀두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물론, 역사적으로 고증된 부분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원성왕릉(2018.10.13)

 

신라 38대 원성왕(785~798). 독서삼품과 설치. 김제 벽골제 준공, 불교 육성등 숱한 업적을 남겼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은 의문이 남는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원성왕(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복04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승리자의 기록 같지 않은가? 12.12 별들의 전쟁 때 정승화를 연행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김경신은 군부 지원을 업은 원성왕 지지세력에게 감금 당하지는 않았을까? 

 

승리자들의  해몽을 보자.

 

"꿈의 해몽에서도 처음에는 실직하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것이라 하여 두문불출했는데, 다시 아찬 여삼이 와서 해몽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음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은 12손이 대를 이를 징조요, 천관정에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상서“라고 했다.

 

여기서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평탄치 않았음이 드러난다.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원성왕의 지지세력들의 상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삼은 아찬이니 6두품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천관사 우물과 12현금(가야금)은 김유신가계와 가야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영남 불교 연구원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괘릉에 위치했다는 곡사 창건주 파진찬 김원량이 원성왕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 이라는 것을 알면 또 머리가 복잡해진다. 외척이 창건한 사찰을 옮기면서 까지 왕릉을 조성한 까닭이 무엇일까?

 

자료를 찾아 보아도 풍수의 종조 도선국사 생몰년대와 원성왕 사망이 한세기 차이가 있어 풍수지리 음택 비보론도 타탕지 않다. 세종대왕이 광주 이씨 조상묘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혹 조선 태종이 세종대왕의 왕권강화, 외척세력 약화를 위해 외척을 죽음으로 몰고간 경우로 보고 싶지만 갈항사지 동탑 명문으로 판단해보면 전혀 합당하지 않다.

 

갈항사지동서삼층석탑(2014.10.31)

 

[갈항사지 동탑명문은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무렵으로 통일신라의 문화가 난숙미를 더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쓰여진 것이다.

이로 보면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할 당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고,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세력이 탑을 건립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영남불교 연구원 

 

이인자에서 왕권을 잡았으니 전대왕조와 다른 문화적 특색과, 외가의 묵인하에 강한 경고성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외가에서 창건한 곡사 자리에 화려하고 유례가 없는 왕릉을 축조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합리화를 위한 기록이 전해오지만...

 

명주군왕릉(2017.08.03)


졸지에 왕으로 등극은 고사하고 이인자에게 밀려난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쫒겨가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 ’으로 봉해졌으며,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관음리 오층탑 입구에 있는 김주원의 묘와 승리자 원성왕릉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 있다.

정승화 장군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가 훗날 명예회복 되었듯이 원성왕도 왕권확립 후 김주원에게 다양한 혜택을 내렸다고 한다.


 


원성왕의 원찰이었던 숭복사.

그 절터는 화려했던 영화를 누렸던 금당 앞 두기의 탑, 소맷돌을 비롯 석조 부재들만 뒹군다. 

원성왕 옹립세력인 6두품인 최치원 아버지도  창건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런 사유로 훗날 최고은이 사적을 새긴 비문을 숭복사에 남겼다면 견강부회일까?

 

 

두기의 동서탑은 멸실이 심하다. 

상기단에는 팔부신상 모습을 조각하였다. 

초층 탑신에는 문비를 두었고. 옥개석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신라 하대 탑임을 알 수 있다. 

 

 

팔부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천(天), 용(龍), 야차(夜次),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 婆), 긴나라(緊那羅), 가루라(迦樓羅), 마후라가(摩 羅伽)를 말한다.

 

 

탑층수를 야무락지게 구분하던 꼬마도 어른들도 포항님들이 준비해온 고구마, 지천에 널린 감홍시로 허기를 채우고 있다. 

동행한 꼬맹이는 저렇게 과자 봉지를 내동댕이 쳐 놓고 있다.

그럼!!!

배가 불러야 제대로 보이지!!! 

어차피 손에 들어온 과자인데 고매부터 먹어야지! ㅎㅎㅎ

 

 

흩어진 부재들 속에 소맷돌을 발견하고 버선코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불국사 소맷돌을 어떤이는 영암사지 소맷돌 가릉빈가를 최고라고 한다.

 

그대!!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원성왕과 쿠데타 세력, 괘릉, 종교 지도자, 외척 김주원, 최치원 숭복사 비문, 경주박물관 쌍귀부...

무궁무진한 소재를 배경 삼아 만추에 소설 한편 탈고 해보세요.

 

200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