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무장사지 삼층석탑
조붓했던 길 신작로가 되었다.
많은 오류가 보이지만 아래의 2007년 글로 대신한다.
2018.10.13 |
아래는 2007년 글
올들어 가장 더운 날? 지난밤 음주가무에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마음이 괴롭고 파김치가 된 육신 땡볕에 노출시켜 흠뻑 땀을 흘리고 싶어 무장사지로 향했다. 이열치열이라는 식자들의 한가한 사치로움이 아니라 나태하고 부족한 내자신을 시험하기위해...
간사한 놈. 팻말이 고맙기는 커녕 내려가고픈 마음이 굴뚝 같다. 아직 2KM?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좁은터 산맥의 마지막 기가 모여 옹골차게 자리한 듯한 무장사지는 폐사지가 아니라도 괜히 사람의 심성을 자극할 것 같다.
심심유곡, 산짐승도 오르내리기 험한 깊은 산속에 왜 절을 세웠을까? 무장사. 문무왕이 지긋지긋한 전화를 끝내고 평화를 염원하며 병기와 투구를 묻어 붙여진 절이라는 의미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은 숙부 파진찬을 기리기 위해 무장사를 세운 절이며 미타전이 있었다고 한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우주만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5단이며, 처마의 반전은 부드럽다. 2단의 기단.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을 면마다 2개씩 조각하였다.
비는 신라 소성왕(799∼800)의 왕비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봉안한 내력을 새긴 것으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비는 무슨 까닭으로 깊고깊은 이 산골에 비를 조성하고 극락왕생을 빌었을까?
"신라 38대 원성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지만 아들 복은 없었는지 두 아들이 죽고 장손자 혜충이 왕이 된다. 그가 39대 소성왕이다. 이 소성왕도 아버지의 명을 받았는지 왕 노릇도 겨우 1년 5개월(799년 1월~800년 6월)을 하다가 죽는다.
슬픔에 겨워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하였다는 소성 왕비 계화는 자신의 화려한 옷과,창고에 쌓아둔 재물을 다 털어서 이름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아미타불상을 만들고 남편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남몰래 깊은 시름에 잠겨,오매불망 소성왕을 그리워했다"는 사적비를 여기에 적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소성왕이 죽었을 때 큰아들이 겨우 13세이고 그 아래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고 큰아들 청명이 삼촌 김언승에게 칼을 맞아 죽는 애장왕이 된다. 둘째아들 체명은 형 애장왕을 호위하다가 역시 반군에게 죽는다. 막내 어린 딸 장화는 반군 편에 가담한 김언승(41대 헌덕왕)의 동생이며 자신의 숙부 수종에게 시집갔으나 남편 겸 숙부는 42대 흥덕왕이 된 지 2개월 만에 죽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다음
이수에는 구름속을 여의주를 잡고 구름속을 유영하는 용이 새겨져 있다. 석비는 통일신라 초 태종무열왕릉비와 더불어 흔치 않은 이수이다.
비좌 사각형이며, 각면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다. 쌍거북 귀부도 숭복사지 창림사지 법광사지에서만 보이는 형식으로 시대적 편년을 알 수 있어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목을 축인들 몸마져 시원할리 없어 드디어 홀라당 벗고 뛰어 들었다. 고운 심성의 선녀님이 내 옷을 숨기기를 바라면서...
훗날 사가들은 그곳을 선과담(善果潭)이라 불러 주려나?
07.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