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세종대왕 태실지
태실(胎室)은 태를 묻은 곳이다. 태실조영기(胎室造營記)에 의하면 태를 산에 묻는 것을 안태(安胎)라 하고 안태산을 태봉(胎峯)이라고 한다. 태봉은 태실(胎室), 태비(胎碑), 표석(表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실이란 말은, 태항아리를 넣은 석함위에 축조된 중동석 중심으로 바닦에 돌을 깔고, 8각의 돌난간으로 둘려진 부분을 말한다. 태비는 태실 주인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으로, 귀대석을 아래에 깔고 이수를 얹었다. 표석은 태봉의 영역을 표시한다.
사천시 곤양면 은사리에 위치한 세종 대왕 태실지의 부재들이다. 태실지는 현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며 민묘가 들어서 있다. 일제는 태실이 길지에 위치한 사실을 간파하고 강점기에 조선의 정기를 끊어 국운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 1929년 전국에 산재해 있던 태실을 경기도 양주로 옮겼으며 이때 세종대왕 태실도 옮겨 갔다.
몇차례 언급했지만 태를 조선왕조에서는 생명을 준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여 왕자, 공주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게 된다. 그러한 태를 봉안하기 위한 절차를 세종대왕 왕자 태실지가 있는 경북 성주군에서는 매년 봉안례를 올리고 있다.
태실비
세종대왕 태실지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하여 도굴되고 훼손된 것을 선조 34년 중수하였다. 그리고 1734년(영조 10)에 세종대왕 태실비를 건립하였다. 태실비 전면에는 세종대왕태실, 후면에는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楨) 기원 후 107년 갑인(1734) 9월 초 8일이 음각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태실이 묻힌 지역을 승격시켜 태실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곤명면(昆明面)은 <세종실록지리지> 곤남군조에 의하면 “˙˙˙ 신라시대의 칭호는 미상이나 고려 현종 무오(戊午 1018)에 진주에 속하였다가 세종 즉위 원년에 어태를 소곡산(所谷山)에 안치케 되고 곤명인의 소청으로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고 하였는데, 실로 파격적이었다."
![]() 사천시 소장 『세종대왕·단종대왕 태실 수개의궤』는 모두 3권으로 되어 있으며 태실을 수개하였거나 태실의 석난간을 수개하였을 때 그리고 태실의 표석을 세울 때의 여러 가지 정황과 절차, 제의과정, 석물의 형태, 제작과정, 동원된 인력과 물품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어 가치가 있다.
이곳 어디가 본래 태실지었지만 민묘가 들어서 있다.
2013년 3월 주민으로부터 제보가 있었다. 여기는 민묘이며 태실지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때도 들녘은 넘실넘실 황금 물결로 넘쳤을텐데. 2011.10.09 |